기획재정부 정책총괄과는 지난 4일 오후 8시 각 부처 산하 공공기관과 공기업에 긴급하게 공문을 발송했다. 공문은 “늦은 시간에 연락을 드려서 죄송하다”는 공손한 문장으로 시작했지만 내용은 “연내 단기 일자리 확대방안을 작성해 내일 오전 11시까지 보고하라”는 압박 문구로 채워졌다. ‘3개월 내. 10~12월 내 채용’이라는 구체적인 지침도 담겼다. 산하기관 수가 가장 많은 산업통상자원부와 국토교통부가 기재부의 ‘타깃’이 됐다. 공기업 평가를 담당하는 기재부의 지시를 받은 공공기관들은 한밤중에 채용계획을 급조해 기재부에 보고했고, 그대로 정부 목표가 됐다.
[단독] 정부 '세차례 압박'에… KOTRA 결국 "알바 112명 채용"
공기업에 ‘더 채용하라’ 팔 비틀기

22일 박맹우 자유한국당 의원에 따르면 산업부 산하 공기업·공공기관 41곳 중 14곳이 정부의 요구에 응했다. 기술보증기금은 정부 요청이 오자 기대에 맞추기 위해 550명 규모의 ‘청년기술평가 체험단’을 꾸리겠다는 계획안을 곧바로 기재부에 재출했다. 정규직 직원 1337명의 40%에 달하는 인력을 2개월짜리 아르바이트로 채용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공문을 보낸 기재부조차 “체험단의 실제 활동기간이 10일 미만에 그치는 등 실효성이 없다”고 판단해 기보의 사업계획 자체를 취소해버렸다. 산하기관조차 무리한 정부 지침에 현실성이 부족한 사업계획안으로 답한 셈이다.

       박맹우 의원
박맹우 의원
한국전력공사 계열사로 전력·산업 설비 관리를 주로 하는 한전KPS는 두 번째로 많은 239명을 채용하기로 했다. 이미 9월까지 1500명 이상을 채용한 바 있지만 기재부 압박에 숫자를 더 늘린 것이다. 단기 채용자들은 주로 정비공사 현장지원 인력으로 투입될 예정이다. 3분기 화력·원전부문 발전 정비 수요 감소로 실적 악화가 우려되는 가운데 무리하게 채용을 늘렸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채용계획이 없다고 밝힌 공기업을 ‘쥐어짠’ 의혹도 제기됐다. 박 의원은 이날 국정감사장에서 “채용계획이 없다고 밝힌 KOTRA를 압박한 정황이 있다”고 주장했다. KOTRA는 지난달 17일에도 단기 일자리 채용계획을 보내달라는 기재부의 공문을 받았다. KOTRA는 다음날 채용계획을 ‘0명’이라고 밝혀 사실상 정부 요구를 거절했다. 하지만 9일 뒤인 지난달 28일 기재부로부터 재차 채용계획을 늘려달라는 공문을 받고 채용계획을 ‘10명’이라고 수정해 보냈다. 기재부로부터 ‘성에 차지 않는’ 숫자라는 질책이 뒤따랐다. 지난 4일 세 번째 공문을 받고 채용계획을 10배로 늘려 112명으로 보고했다.

권평오 KOTRA 사장은 박 의원 지적에 대해 “기재부의 독촉에 억지로 없던 일자리를 만들겠다고 제출한 것은 아니다”며 “정부가 처음 공문을 보낸 당시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해 인력수요 조사를 충분히 하지 못한 것일 뿐”이라고 답했다.

새로 생긴 일자리 대부분 단순 직무

LH(한국토지주택공사)·한국도로공사·코레일(한국철도공사) 등 국토교통부 산하 23개 공공기관도 올해 말까지 380여억원을 들여 1만2500명의 단기 채용을 하기 위해 준비 중이다. 이들 인력 역시 대부분 도로 청소, 고객 안내, 홍보물 배포 등 단순업무를 맡는다. 김동연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이 최근 국정감사에서 “청년 취업자의 경력 관리와 자기계발 차원에서 일자리를 제공하겠다는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새로 마련한 일자리 대부분은 단순 직무였다.

산업부 산하기관의 단기 일자리 확충 사업 역시 ‘단순노무’라는 점에서 사정이 다르지 않다. 177명을 채용하겠다고 밝힌 중소기업진흥공단은 2개월간 월급 146만원을 준다. 서류 전산화, 서류 수령 분류 등이 주 업무다. 64명을 채용하겠다고 한 한국가스공사는 3개월 동안 월 173만원을 주고 행정업무 지원, 설비 안전점검 보조 등의 업무에 투입한다. 한국석유공사는 고령층을 대상으로 사옥 제초작업 및 식당 업무보조 일을 맡길 예정이다.

박 의원은 “기재부 독촉으로 쥐어짜낸 공공기관 단기 일자리는 세금 지원이 끊어지면 없어지는 가짜 일자리”라며 “고용과 통계 조작을 위한 의도가 숨어 있다”고 비판했다.

박종필 기자 j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