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념 前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표 중시하는 정치집단 버티고 있는 한 규제혁파는 요원"
진념 前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표 중시하는 정치집단 버티고 있는 한 규제혁파는 요원"
진념 전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78)은 한국 경제 발전사의 산증인이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된 1962년 고등고시에 합격해 경제 관료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반세기 넘도록 경제 발전의 현장을 지켜온 원로로서 진전 부총리는 한국 경제의 현재와 앞날에 대해 할 말이 많아 보였다. 현장을 떠난 지 꽤 세월이 흘렀지만, 경제 현안에 대한 답변에 막힘이 없었다. 핵심을 꿰뚫고, 문제 해결 방안에 대해서도 매우 구체적으로 답변을 제시했다. 진 전 부총리와의 인터뷰는 서울 서초구 개인 사무실에서 2시간 동안 진행됐다. 인터뷰 내내 ‘도전’과 ‘혁신’, ‘창의’와 ‘역동’이란 단어를 유독 강조했다.

▶한국 경제가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요.

“요즘 보면 성장론자들은 퇴조하고 분배론자들이 득세하는 그런 분위기를 느낍니다. 그런데 성장 없는 분배라는 게 없어요. 성장을 하되 좀 더 좋은 성장을 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주는 게 중요합니다. 경제 활력은 떨어지고, 성장 엔진이 식어가고 있는 것을 걱정하는 사람이 많아요. 특히 청년들은 취직도 안되고 연애도, 결혼도 안되는 ‘3포세대’ 이런 얘기까지 나오는 데 대해선 매우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웃 일본만 하더라도 대학교 다닐 때 입도선매로 취직되고, 미국도 완전고용 상태이면서 성장률도 우리를 앞서잖아요. 우리만 저성장의 트랩에 갇혀 있다는 건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봅니까.

“경제는 심리입니다. 경제 주체들의 자신감이 떨어지면 아무것도 안됩니다. 일본의 경우를 봅시다. 과거 일본을 떠났던 많은 기업이 다시 돌아가고 있어요. 고용 유연성 등 정부의 리쇼어링 정책으로 기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우리 기업들은 여전히 국내 투자보다는 해외 투자를 늘리고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고비용·저효율 구조로 버텨낼 재간이 없거든요. 이런 환경을 바꾸지 않고 기업들한테 투자하라고 하면 누가 하나요? 기업이 열심히 뛰도록 하고, 그래서 투자해 일자리 만들고, 수출해 외화 벌어들이고, 그런 게 애국자라고 격려해야 합니다. 결국 기업이 챔피언이거든요. 걸핏하면 조사한다 해서 대기업 총수들 부르고, 국회에서도 국정감사 참고인으로 수시로 오라가라 합니다. 그러면 안돼요. 기업을 제대로 뛰게 내버려둬야 합니다.”

한국만 ‘저성장 트랩’ 갇혀

▶낙수효과, 더 이상 기대난망인가요.


“물론 낙수효과라는 것은 경제가 글로벌화되는 과정에서 옛날에 비해 많이 떨어지는 건 사실이에요. 그렇다고 수출산업은 안된다고, 대기업은 일자리 못 만든다고 비난만 해서는 문제 해결이 안됩니다. 경제 생태계 복원을 통해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연계성을 만들어줘야 합니다. 여기에 추가해 고용 탄성치가 높은 글로벌 서비스산업에 집중해 보완할 생각을 해야지 낙수효과가 작다고 정부가 인위적으로 분수만 뿜어내면 결국 국민 부담만 키우고, 세금만 잘못 쓰는 꼴이 됩니다. 지속 가능하지도 않고요. 오히려 건강한 경제 생태계를 훼손할까봐 걱정이 큽니다.”

▶정부 역할은 어떠해야 합니까.

“과거 개발연대에는 이른바 ‘지도받는 자본주의(guided capitalism)’라고 해서 정부가 모든 자원을 배분하고 통제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지났습니다. 과거처럼 특정 산업을 육성하겠다, 이럴 능력도 없어요. 모든 걸 민간부문에 맡기고, 정부는 시장이 할 수 없는 일, 예컨대 노인대책이나 사회안전망, 국가 안보와 국민 안전을 위한 역할에 집중해야 합니다. 복지시스템 같은 공공재는 정부가 맡아야 하지만 시장 영역까지 정부가 개입할 경우 생태계 자체가 무너지게 됩니다. 기름값이 비싸다고 하니까 알뜰주유소를 정부가 만들었는데, 대표적인 실패작 아닙니까?”

알뜰주유소 대표적 정부 실패작

▶혁신성장 요체는 무엇이라고 봅니까.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기존 산업의 혁신을 어떻게 일으킬 것이냐, 예를 들어 독일의 인더스트리 4.0 같이 기존 산업을 첨단 정보기술(IT)이나 인공지능(AI)과 접목해 업그레이드하는 것이죠. 다른 한쪽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게 새로운 산업을 일으켜 많은 사람이 그 분야에 들어와서 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혁신성장이야말로 성장의 핵심입니다. 이른바 소득주도성장은 혁신성장 없이는 사상누각이라고 봐요. 소득 없이 어떻게 소득주도성장이 됩니까? 소득을 만들어내야지. 모두가 혁신성장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지만 말만 많았지, 과연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에 대해서는 별로 고민이 없어요.”

▶어떻게 해야 혁신성장이 성공할 수 있을까요.

“우선 기존 주력산업은 끊임없는 구조조정과 생산성 향상을 통해 경쟁력을 확보하도록 해야 합니다. 조선산업이 제때 구조조정에 실패하는 바람에 파급이 엄청나잖아요. 자동차산업도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구조조정에 실패하면 조선, 해운산업보다 훨씬 더 큰 충격이 몰려올 겁니다. 기존 산업은 과감한 구조조정을 통해 경쟁력을 높이도록 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산업분야는 공공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열어줘야 합니다. 중국을 보세요. 중국의 BAT(바이두, 알리바바, 텐센트) 기업들이 20년도 안돼 미국의 FAANG(페이스북, 아마존, 애플, 넷플릭스, 구글)에 도전장을 내밀 정도로 비약적인 발전을 했잖아요. AI를 장착한 화웨이 가전제품이 우리 가전기업에 굉장한 위협을 주고 있는 것 아닙니까? 중국은 국가 체제에 위해를 주지 않는 한, ‘선(先)시행 후(後)규제’로 모든 걸 풀어버리거든요. 사회주의 정치적 색깔만 빼면 중국이 오히려 우리보다 더 시장친화적입니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합니다.

▶규제개혁이 여전히 잘 안되는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규제개혁은 정치적 의지와 결단의 문제입니다. 규제개혁이 어려운 건 기존 규제 뒤에 기득권이 있고 정치세력화가 돼 있기 때문이에요. 예를 들어 원격의료라든지, 투자개방형 병원이라든지, 이런 건 전부 의사집단이 뒤에 있고, 이들이 정치세력화가 돼 있어요. 공무원도 기득권 세력에 포함됩니다. 이걸 진짜 빅뱅한다, 이런 결연한 자세를 갖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어요. 표를 중시하는 정치집단이 버티고 있는 한 규제혁파는 요원합니다. 이를 돌파할 수 있는 지도자의 결단력이 결국 관건입니다.”

정치색 빼면 中이 더 시장친화적

▶기업가정신이 사라졌다는 우려가 많습니다. 어떻게 되살릴 수 있을까요.

“기업의 잘못된 관행도 많죠. 그래도 수출해서 외화 벌어들이고, 일자리 만들고, 세금 내고, 이게 기업들이 해온 거 아닙니까. 정치권 누구보다도 더 애국적인 사람들이에요. 마음껏 뛸 수 있는 환경을 정부가 지원만 해주고 간섭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기업이 뛰고, 기업이 뛰어야 경제가 살아납니다. 그런데 아직도 과거 낡은 관행이 많이 남아 있어요. 기업들 오라 해서 당신 얼마 투자할 거냐, 고용 얼마나 늘릴 거냐며 계획서 받고… 그게 지금 할 일인가요? 기업은 웅크리면 한 단계 더 뛸 수 있지만 움츠리면 기어갈 수밖에 없는 거예요. 기업이란 게 돈이 되고 사업성이 있다고 하면 동물적으로 투자하는 것이지, 정부에서 하란다고 투자할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기업들 책임은 없을까요.

“경영계도 적극적으로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일감 몰아주기부터 하청업체 가격 쥐어짜기 같은 관행은 차제에 스스로 고쳐야 합니다. 경영단체를 만날 때마다 이런 얘기를 합니다. 자꾸 정부 눈치 보고 할 얘기도 못하고 규제만 풀어달라 하지 말고, 우리는 앞으로 낡은 경영관행 개선을 위해 이렇게 노력하겠으니 지켜봐다오. 대신 우리 기업들 편하게 뛸 수 있도록 지켜만 봐다오. 이런 노력을 왜 안하냐는 말이죠.”

▶전통 주력 제조업이 위기입니다.

“제조업은 다 맛이 갔다, 이렇게 생각하는 건 아주 잘못이라고 봐요. 독일을 보면, 인더스트리 4.0이란 혁신정책을 통해 어떻게 하면 산업을 업그레이드할 것이냐, 여기에 집중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과정에서 2003년 게르하르트 슈뢰더 사민당 당수의 대결단도 큰 역할을 했어요. 정권을 뺏길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사회 경제 전반을 개혁하는 ‘아젠다 2010’을 추진했습니다. 표를 좇는 정치꾼이 아니고, 독일의 미래를 걱정하는 정치가가 되겠다 해서 이런 결단을 한 것입니다. 이런 결단이 있었기에 지금 독일 경제가 건강하게 가고 있거든요.”

▶고비용·저효율 산업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지적도 많습니다.

“현대자동차가 대표적이지 않습니까? 독일 미국 등은 자동차 신기술 개발 속도가 굉장히 빠른데, 현대차는 통상 쪽의 제약, 기술에서의 한계, 고임금 저생산성의 문제 등에 겹겹이 둘러싸여 있어요. 오죽하면 제2대 현대차 노조위원장을 했던 사람이 작년에 그런 얘기를 했을까요. 자기가 볼 때도 우리나라 자동차산업이 이대로 가면 미래가 없다고… 지금이라도 우리 자동차산업의 경쟁력을 놓고 노사가 만나 냉철하게 판단하고 각자 역할을 정립해야 합니다. 그래서 연봉 8000만원 이상인 대기업 노조는 예컨대 ‘3년 동안 우리가 임금을 동결할 테니 대신 납품단가를 올려 2, 3차 협력업체와 비정규직을 끌어안자’는 제안을 할 정도로 특단의 노력을 보여줘야 변화가 생길 수 있다고 봐요. 노사정 사회적 대화도 자꾸 큰 거만 얘기하지 말고 이런 실질적인 것을 도출하도록 해야 합니다. ”

▶고용쇼크가 심각한 수준입니다. 해법은 무엇입니까.

“일자리 문제와 관련해서는 처음부터 콘셉트를 잘못 잡았어요. 일자리는 정부가 만든다는 관점으로 접근한 건데 그건 아니죠. 역대 정부가 그랬듯이 지금 정부도 슈퍼예산 짜서 일자리에 몇십조원을 퍼붓고 있는데, 그렇다고 고용상황이 나아진 게 없잖아요. 국민생활 안전이나 환경, 식품, 소방, 복지서비스 관련 인력을 늘리겠다는 건 이해하지만, 어떻게 정부가 이런 공공부문에서만 83만 개 일자리를 만드나요? 오히려 성과는 나빠지고 있잖아요. 기본적으로 일자리는 민간 기업에서 만든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정부는 민간이 일자리를 만들 수 있는 환경 조성에 정책역량을 집중해야 합니다.”

선한 정책만으론 정부 성공 못해

▶일자리 정책의 속도 조절론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합니까.


“근로시간 단축과 최저임금 인상, 이런 정책도 좀 더 유연성 있게 해서 기존 영세사업자들의 고통이 더 이상 이어지는 걸 막아야 합니다. 최저임금만 하더라도 내년까지 29% 넘게 올라가는데, 언제까지 정부가 세금 갖고 보전할 건가요? 속도조절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선과 악으로 경제 문제를 접근해선 안돼요. 근로시간 단축도 ‘과로사회가 되면 되겠냐’는 선한 의도로 시작한 건데, 연구개발(R&D)이나 긴급한 시설보수 이런 분야에까지 주 52시간 딱 잘라 제약해버리면 옴짝달싹할 수가 없어요. 업종별 특성을 감안해 탄력근로시간 단위를 1년까지 확대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가져야 합니다. 최저임금도 마찬가지예요. 목표는 좋은데 급하게 가버리니까 문제인 겁니다. 선한 정책만 갖고 성공하는 정부는 없습니다. 속도와 방법에 대해 유연성을 갖고 대응하는 정부야말로 스마트 정부예요.”

■약력

△1940년 전북 부안 출생
△전주고, 서울대 상과대 졸업
△14회 고등고시 행정과 합격(1962년)
△경제기획원 사무관, 종합기획과장, 물가정책국장(1963~1981년)
△기획차관보(1983년)
△해운항만청장(1988년)
△재무부 차관(1990년)
△동력자원부 장관(1991~1993년)
△노동부 장관(1995~1997년)
△기획예산처 장관(1999~2000년)
△재정경제부 장관(2000~2002년)
△경제부총리 겸직(2001년 1월~2002년 4월)
△삼정KPMG 고문(2002~2013년)


정리=성수영/사진=김범준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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