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에서 떨어진 운석 같은 돌과 함께 살아가는 마을 몬산투.
우주에서 떨어진 운석 같은 돌과 함께 살아가는 마을 몬산투.
때로 한 장의 사진에 이끌려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지붕 위에 거대한 바위를 이고 있는 집. 이 독특한 풍경을 직접 보고 싶어 스페인 접경의 몬산투에 갔다. 돌을 운명처럼 품고, 돌처럼 단단하게 국경선을 지켜낸 성곽 마을이었다. 때로는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에게 이끌려 여정에 없던 장소에 가기도 한다. 몬산투에서 리스본으로 돌아오는 길, 카스텔루 브랑쿠에서 만난 이들 덕에 마르팅 브랑쿠라는 숨은 보석 같은 마을을 발견했다. 우연이 준 선물 같은 여행이었다.

투박한 화강암과 함께 산다, 몬산투

포르투갈에서 가장 포르투갈다운 마을
몬산투는 1983년 ‘포르투갈 사람들이 뽑은 포르투갈에서 가장 포르투갈다운 마을’로 선정되며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어째서 황량한 벌판 한가운데 불쑥 솟은 돌산 중턱의 작은 마을이 포르투갈다운 마을로 뽑힌 걸까? 투박한 화강암 산기슭에 옹기종기 돌집이 모여 있는 겉모습만 봐서는 섣불리 판단할 수 없다. 자세히 들여다봐야 한다. 일단 걸어야 한다. 세월이 내려앉은 돌길 위에 돌담을 낀 돌집이 끝없이 이어지는 골목을. 걷다 보니 몬산투에는 ‘미라도우루(Miradouro)’가 군데군데 있었다. 미라도우루는 포르투갈어로 전망대라는 뜻이다. 제일 찾기 쉬운 곳은 마을 어귀의 시계탑과 작은 교회 사이로 난 길을 쭉 따라가면 나오는 전망대다.

전망대에 서자 눈앞에 들판과 화강암 언덕 위 돌집들이 입체적으로 펼쳐졌다. 산책하던 동네 어르신도 그곳에 발걸음을 멈추고 먼 곳을 응시했다. 이 척박한 땅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15세기부터다. 그 흔적은 산 정상의 성터에서 엿볼 수 있다. 중세에 지은 건축물로 화강암 위에 세운 성과 지하 감옥, 성벽의 일부가 겨울을 맞은 나무들처럼 검게 변한 채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성 안에는 망루와 산타 마리아 성당도 남아 있다.
오렌지가 주렁주렁 달린 카스텔루 브랑쿠의 가로수.
오렌지가 주렁주렁 달린 카스텔루 브랑쿠의 가로수.
성 옆으로는 세월의 잔해를 그대로 껴안은 산 미구엘 교회와 종탑이 이어진다. 스페인의 공격을 받았지만, 물러서지 않고 마을을 지켜온 전쟁의 상흔이다. 성곽 너머로는 푸른 평원과 이어지는 스페인의 땅이 아스라이 펼쳐졌다.

파수 에피스코팔 정원을 겨울별장으로 삼았던 주교의 초상화.
파수 에피스코팔 정원을 겨울별장으로 삼았던 주교의 초상화.
몬산투의 곳곳을 둘러본 뒤, 사진에서만 본 지붕 위에 거대한 바위를 이고 있는 집을 찾았다. 그냥 집이 아니라 식당 ‘페치스쿠스 에 그라니토스’였다. 오너 셰프 주앙에게 돌집에 사는 것이 불편하지는 않은지 물었다.

“아니요. 오히려 아늑하죠. 옛 사람들은 바위가 이 땅의 주인이라 여겨 부수거나 옮기지 않았어요. 오히려 거대한 돌을 지붕 삼고 벽 삼아 집을 지었지요. 암석과 암석 사이를 막아 천연 냉장고, 그루타(Gruta)도 만들어냈어요. 여름에 그루타 안에서 맥주를 마시면 얼마나 시원한지 몰라요.”

그제야 몬산투가 품은 이야기를 알게 됐다. 포르투갈다운 마을이란 수식어에는 돌을 운명처럼 품고 삶을 이어가는 특유의 정서가 녹아 있으리라. 그래서일까. 말 없는 돌에서도 온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② 파란색 문이 도드라져 보이는 황토색 편암으로 지은 집
② 파란색 문이 도드라져 보이는 황토색 편암으로 지은 집
겨울 정원으로 오세요, 카스텔루 브랑쿠

카스텔루 브랑쿠(Castelo Blanco)는 버스로 몬산투에 가려면 거쳐야 하는 관문 도시다. ‘중세 성곽 도시의 흔적과 바로크식 파수 에피스코팔 정원이 잘 보존돼 있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큰 기대는 없었다. 한 달간 포르투갈 여행의 막바지라 조금 지쳐 있었던 것도 같다. 카스텔루 브랑쿠의 홍보 담당자 실비아가 건축가 친구 주제까지 동원해 옛 성채의 원형이 어땠으며, 정원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려주지 않았다면 낯선 도시의 숨은 매력을 몰라볼 뻔했다.

카스텔루 브랑쿠의 가장 높은 언덕에 오르자 중세에 위엄을 뽐내던 성벽 몇 토막이 짧고 굵게 남아 있었다. 중세에는 온 도시를 휘감아 성곽도시의 위엄을 뽐냈단다. 십자군 전쟁 때 성지 순례자 보호를 위해 설립된 템플 기사단이 12세기에 요새를 짓고, 13세기에 동 디니스 왕이 더욱 확장했으나 지금은 일부밖에 남아 있지 않다고.

성벽 너머로 도심 한가운데 우주선이 불시착한 듯 현대적인 건물, 컨템퍼러리 컬처센터(CCC)가 시선을 끌었다. 리스본의 베라도 미술관과 파트너십을 맺고 디에고 리베라, 다비드 알파루 시퀘이로스 등 다양한 라틴아메리칸 아티스트의 작품을 선보이는 미술관이다.

카스텔루 브랑쿠의 옛 모습을 그린 아줄레주 벽화
카스텔루 브랑쿠의 옛 모습을 그린 아줄레주 벽화
성곽 뒤로는 분수가 있는 공원, 키 큰 나무들이 그늘을 내주는 오솔길이 차례로 연결됐다. 산책하듯 그 길을 지나면 자연스레 구시가로 스며든다. 미로 같은 골목과 꽃향기 만발한 오렌지 나무 가로수 길을 지나 파수 에피스코팔 정원 입구에 당도했다.

“혹시 겨울 별장이라는 말 들어봤어요? 파수 에피스코팔 정원은 옛 주교의 겨울 별장에 딸린 정원이었어요. 이 지역은 포르투갈에서 드물게 겨울이 추워 추위를 피할 곳이 필요했답니다. 수백 년간 주교만을 위한 공간이었는데, 1912년부터 대중에 개방됐지요. 정원의 가장 높은 곳에는 주교가 뱃놀이를 즐기던 연못이 남아 있어요. 자, 이제 들어가 볼까요?”

파수 에피스코팔 정원을 안내하는 주제의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자부심이 깃든 미소였다. 그의 설명처럼 정원은 바로크 양식 특유의 정교한 계산을 바탕으로 꾸민 인공미를 한껏 발산했다. 기하학적 울타리, 인간의 감정을 상징하는 조각상 등 구성이 독창적이었다. 여기에 정원을 오픈하며 추가한 주교의 초상화, 카스텔루 브랑쿠의 옛 모습을 그린 아줄레주 벽화가 화려함을 더했다. 왜 이곳이 포르투갈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로크식 정원으로 꼽히는지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① 역대 포르투갈 왕의 동상이 줄지어 서 있는 파수 에피스코팔 정원 연못가
① 역대 포르투갈 왕의 동상이 줄지어 서 있는 파수 에피스코팔 정원 연못가
구석구석 볼거리가 많아 몇 시간이고 머물 수 있을 것 같았다. 특히 눈길을 끈 부분은 연못 아래에 그 물을 끌어 만든 분수와 역대 포르투갈 왕의 조각상이었다. 이 조각상들이 사각형 연못을 둘러싸고 있는 모양새인데, 왕의 동상들 중 유독 한 명, 펠리페 1세의 크기가 작았다. 이유를 물었더니, 일부러 스페인 출신 왕만 다른 포르투갈 왕들보다 작게 만들었단다. 애국심에서 비롯된 소심한 복수에 피식 웃음이 났다.

시스투로 지은 집, 마르팅 브랑쿠

“여기까지 왔는데 점심은 먹고 가야죠. 같이 차를 타고 근교의 작은 마을, 마르팅 브랑쿠로 가요.” 실비아가 말했다. 당황했다. 뜻밖의 초대였다. 주제도 마르팅 브랑쿠의 시스투로 지은 집을 꼭 보여주고 싶다며 붙잡았다. 말로는 내일은 한국행 비행기를 타야 하니 리스본에 일찍 가야 한다고 했지만, 몸은 차로 향하고 있었다. 포르투갈을 떠나기 전 하루쯤은 마음이 가는 데로 발길을 옮겨도 괜찮을 것 같았다.

얼마쯤 달렸을까. 차창 너머로 졸졸 개울물 소리가 들렸다. 올리브 나무 사이를 지나자 독특한 돌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스투(Xisto)로 지은 집들이었다. 우리말로 편암인 시스투는 조암 광물이 수직 방향으로 재배열된 변성암의 일종으로 잘 쪼개지는 것이 특징이다. 포르투갈 중부에서 많이 발견되는 암석으로 카스텔루 브랑쿠 주변 농가에서는 수세기 전부터 가정주택을 짓는 재료로 애용해 왔다.

③ 마르팅 브랑쿠에서 맛본 시스투 와인과 양고기 찜
③ 마르팅 브랑쿠에서 맛본 시스투 와인과 양고기 찜
올리브 나무 뒤엔 농가를 레스토랑 겸 숙소로 개조한 ‘시스투 센티두(Xisto Sentido)’가 있었다. 문을 열기도 전에 인상 좋은 아주머니가 앞치마 차림으로 나와 반겼다. 뭘 좋아할지 몰라 다 준비했다며 어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그제야 깨달았다. 내겐 느닷없는 초대였지만 실비아에겐 계획적인 초대였다.

은퇴 후 시스투 센티두를 운영한다는 부부는 귀한 손님 대하듯 음식을 내왔다. 푹 익을 때까지 오래 요리한 양고기 찜 등 하나같이 손이 많이 가는 가정식 요리였다. 주인 아저씨는 맛있는 음식에 와인이 빠질 수 없다며 한쪽 벽면에 꾸민 바에서 ‘테라스 드 시스투(Teras de Xisto)’라는 와인을 꺼내왔다. 포르투갈에서 가장 와인을 많이 생산하는 알렌테주(Alentejo) 지방에서도 편암이 많은 토양에서 자란 포도로 만든 와인이라고 했다. 잔을 비울수록 식탁에 둘러앉은 이들의 웃음소리도 한 옥타브 높아졌다. 우리는 와인 잔을 비우고 달콤한 디저트에 에스프레소를 마실 때까지 늘쩡늘쩡 점심을 먹었다.

시스투 센티두를 나서는데, 실비아와 주제가 약속이라도 한 듯 물었다. 점심도 먹었으니 다 같이 카스텔루 브랑쿠의 현대미술관 전시 오픈에 가면 어떻겠냐고. 끝나고 저녁까지 먹고 가도 좋다는 태세였다. 예약해 둔 한국행 비행기 티켓만 아니었다면 못 이기는 척 따라나섰을지도 모르겠다. 두 사람 덕분에 웃으며 헤어졌다. 마치 낯선 도시에서 오랜 친구와 작별 인사를 나누는 기분이었다.

몬산투(포르투갈)=글·사진 우지경 여행작가

traveletter@naver.com

여행메모

스페인에서 불과 15㎞ 거리에 있는 접경 도시 몬산투로 가는 길을 멀다. 대중교통으로 갈 경우 반드시 카스텔루 브랑쿠를 거쳐야 한다. 리스본에서 카스텔루 브랑쿠까지 기차를 타고 간 다음 다시 버스로 갈아타는 방법밖에 없기 때문이다.

리스본에서 카스텔루 브랑쿠까지 기차로 3시간 걸리며, 카르텔루 브랑쿠에서 몬산투까지 버스로 1시간 소요된다. 단, 하루에 2~3회밖에 운행하지 않으니 버스 시간표를 확인한 뒤 일정을 잡는 편이 좋다. 몬산투는 아주 작아서 한두 시간이면 마을 구석구석을 둘러볼 수 있다. 카스텔루 브랑쿠 근교 마르팅 브랑쿠는 현지인들이 주말에 하루이틀 머리를 식히러 가는 여행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