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형규 칼럼] 기업이 '태움' 대상이 된 나라
“기업 제도가 낙후됐는데 경제가 발전했다거나, 시장이 낙후됐는데 국가가 발전한 예는 지금까지 없었다.” 서구 경제석학의 얘기가 아니다. 중국 국영 CCTV가 2009년 만든 다큐멘터리 ‘기업의 시대’를 관통하는 주제다. 세계 인구의 81%에게 일자리를 제공해주고, 세계 GDP의 94%를 창출하는 게 기업이란 것이다.

이런 긍정적 기업관(觀)을 토대로 중국이 지난 10년간 어떻게 약진했는지는 긴 설명이 필요없다. 나라 간판은 사회주의인데 창업과 기업의 자유에 관한 한 아시아 최고 수준이다. 반면 한국에서 기업은 ‘태움’의 대상이나 다름없다. 국가부터 시민단체, 언론, 지식인, 대중까지 기업을 재가 될 때까지 태울 기세다.

경영판단도 배임죄로 걸고, 동일 사건으로 열 번 압수수색을 벌이는,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나라가 됐다. 권력기관들이 최선을 다할수록 기업이 위축되는 전형적인 구성의 오류다. 공정거래법, 상법, 스튜어드십 코드로 태우고, 최저임금과 근로시간 단축으로 또 태운다. 이 정부 공약대로면 거의 모든 기업 활동이 기소대상이 될 수 있다. 직장 내 왕따문제조차 CEO를 형사처벌 한다는 판이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이 인도 방문 때 ‘기업 하기 좋은 나라’를 언급해 기대를 모았다. 이후 정부·여당에선 기업을 의식한 행보가 줄을 이었다. 하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을 듯싶다. 여권 실세들의 속내는 별로 달라진 게 없어서다.

“삼성이 세계 1위가 된 것은 협력업체를 쥐어짠 결과다”(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소상공인이 어려운 이유는 대기업 갑질, 불공정계약, 상가임대료에 있다”(추미애 대표). 전가의 보도처럼 ‘갑을 프레임’으로 몰고 간다. 잘 되면 ‘정권 덕’, 못 되면 ‘기승전 대기업 탓’이다.

골수 지지층에선 한술 더 뜬다. 재벌 해체론자들은 ‘재계 저승사자’라는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조차 ‘변절자’라고 공격한다.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은 졸지에 ‘나라의 적폐’ 취급을 받는다. 고용하고 월급 주는 사람들이 고개 숙인 나라가 돼간다.

이런 ‘태움’은 뿌리가 깊다. 1980년대 독점·매판(買辦)자본론이 그 시절 정경유착과 상승작용을 일으켜 ‘재벌 성악설’을 형성해온 것이다. 기업이 커질수록 반(反)기업 정서가 퍼지고, 기업을 공격하는 좌익이념이 패션처럼 소비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역설이다.

물론 재벌이 자초한 면도 없지 않다. 양대 항공사처럼 ‘예쁘게 봐주기’ 힘든 사례가 그렇다. 하지만 일부의 일탈을 일반화해 전체를 매도할 순 없다. 세상은 변하고, 기업들도 변하고 있다. 국내에선 커보이는 기업들도 나라 밖에선 훨씬 덩치 큰 상대들과 피 튀기는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과거의 정지화면만 보고 지금의 기업활동을 단죄하려 들면 그로 인한 피해는 국민 모두의 몫이 된다.

책상에 앉아 상상하면 생태계는 약육강식의 정글일 뿐이다. 한국인의 의식을 지배하는 사농공상의 관점에서 이익을 추구하는 장사꾼(기업)이 곱게 보일 리 없다. 하지만 기업이 성공하려면 소비자를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만족시켜야만 한다. 이런 패러독스를 이해 못 하면 기업 역할을 부정하고, ‘유리창을 깨야 성장한다’는 식의 궤변으로 치닫게 된다.

자꾸 비교되는 것이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이다. 지난 9일 의회 연설에서 그는 “기업을 지키지 않으면서 노동자를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라며 “부의 창출과 국가 번영은 정의와 평등을 보장하기 위한 모든 계획의 토대”라고 했다. 최고의 친(親)노동 정책은 기업의 활성화라는 얘기다. 중국 CCTV도 “현대 사회에서 부의 창출이나 국민의 부 축적, 시장경제와 기업의 발전은 일맥상통하는 것”이라고 했다.

고(故) 노무현 대통령도 ‘기업 하기 좋은 나라’와 ‘사람 사는 나라’의 조화를 모색했다. 기업이 없으면 노동자도, 사람도 잘살 수 없다. 기업을 태우는 나라에 미래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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