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 성에서 내려다 본 그람부사 섬과 키사모스 만의 그림 같은 절경.
베네치아 성에서 내려다 본 그람부사 섬과 키사모스 만의 그림 같은 절경.
그리스는 섬과 바다의 나라다. 이오니아해와 에게해에 거느린 크고 작은 섬만 6000여 개, 보유한 해변의 수는 셀 수조차 없이 많다. 그 어느 곳 하나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지만, 그리스 최대 섬인 크레타의 바다는 조금 더 특별하다. 그중에서도 크레타 서부에는 세계적인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해변과 숨이 멎을 듯 황홀한 비경이 숨어 있다. 흥미진진한 전설과 역사를 품은 섬 속의 섬들, 그 사이를 메운 신비로운 바다, 지천에 널린 야생 꽃과 나무, 수백 종의 새와 동물들까지. 그뿐만이 아니다. 부서지는 파도와 천혜의 자연을 만끽한 뒤에는 신이 내린 만찬이라 불리는 크레타 음식이 한 상 가득 기다리고 있다. 볼거리와 먹거리, 즐길거리 모두 갖춘 서부 크레타에서 이른 여름을 만나고 왔다.

하니아(그리스)=글·사진 고아라 여행작가 minstok@naver.com

해적의 섬, 그람부사

하니아에서 서쪽으로 약 35㎞ 떨어진 곳에 키사모스(Kissamos 혹은 카스텔리 Kastelli)라는 도시가 있다. 겉보기엔 특별할 것 없는 소박한 시골 마을이지만, 바로 이곳에 크레타 최고의 명승지 그람부사(Gramvousa)와 발로스 라군(Balos Lagoon)이 있다. 그람부사는 키사모스 만에 있는 크레타 최북단의 반도와 그곳에 있는 두 개의 섬, 이메리 그람부사(Imeri Gramvousa)와 아그리아 그람부사(Agria Gramvousa)를 총칭하는 단어다. 이메리란 그리스어로 ‘길들여진(Tame)’이란 뜻이고, 아그리아는 ‘야생(Wild)’을 의미한다. 두 개의 섬 모두 무인도인 것은 같지만 여행객들에게 공개된 섬은 길든 섬, 이메리 그람부사다. 아침 일찍 일어나 부지런히 키사모스 항구로 향한다. 그람부사에 가는 유일한 방법인 전용 페리를 타기 위해서다. 크레타 전통 복장을 갖춰 입은 선원이 여행객들을 한 명 한 명 맞이하며 기념사진을 찍는다.
① 그람부사의 베네치아 성은 16세기 베네치아 제국이 오토만 제국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지어졌다.
① 그람부사의 베네치아 성은 16세기 베네치아 제국이 오토만 제국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지어졌다.
야외 갑판에 자리를 잡고 앉자 출항을 알리는 뱃고동 소리가 항구 가득 울려 퍼진다. 페리가 푸른 바다를 세차게 가로지르자 파도 위에는 크고 작은 무지개가 쉴 새 없이 피었다 진다. 한 시간 정도를 달리자 저 멀리 그람부사 섬이 위용을 드러낸다. 그람부사는 단순한 무인도가 아니다. 베네치아 제국이 오토만 제국에 패하기 직전까지 사수했던 최후의 땅이자, 크레타 독립운동이 벌어진 투쟁의 땅, 그리고 크레타에서 오토만의 지배로부터 가장 먼저 벗어난 역사의 땅이다. 섬 가장 높은 곳에는 베네치아 성의 잔해가 남겨져 있다. 1579~1985년 베네치아 제국이 오토만 제국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세운 성으로, 그람부사가 지나온 다사다난한 역사의 중심에 언제나 서 있었다. 그늘 하나 없는 가파른 돌산을 20여 분 올라 성 정상에 도달한다.

바람에 펄럭이는 낡은 그리스 국기 뒤로 푸르디푸른 에게해와 키사모스 만의 모습이 품 안에 가득 들어온다. 숨이 멎을 것만 같은 그림 같은 풍경이다. 그람부사는 ‘해적의 섬’이라는 별칭으로도 유명하다. 그리스 독립전쟁 당시 크레탄 혁명군들은 오토만 군으로 위장해 섬으로 침투, 베네치아 성을 수복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곧이어 적군에 포위당해 바다 한가운데 꼼짝없이 갇히고 만다. 생존을 위해 그들이 택한 방법은 해적이 되는 것. 이후 그람부사 섬은 악명 높은 해적의 본거지로 이름을 떨치게 된다. 그람부사를 떠나기 전 해변으로 향한다. 물이 어찌나 맑은지 바다 밑바닥까지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다. 해안선에서 멀지 않은 곳에 녹슨 난파선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그람부사에 얽힌 수많은 전설과 역사, 그리고 비현실적인 풍경이 뒤섞여 모든 것이 꿈처럼 느껴진다.

천국 한 조각을 떼어다 놓은 듯, 발로스 라군

여정은 발로스 라군(Balos Lagoon)으로 이어진다. 발로스 라군은 케이프 티가니(Cape Tigani)라는 프라이팬 모양의 작은 섬과 그람부사 사이에 형성된 석호다.

병풍처럼 둘러쳐진 거친 절벽 아래 파란 물감에 우유를 가득 풀어 놓은 듯한 신비로운 바다가 펼쳐져 있다. 얕은 수심과 따뜻한 수온, 파도 없이 잔잔하게 흐르는 발로스의 모습은 천국의 한 조각을 떼어놓은 듯한 느낌이다.

발로스 라군은 그람부사와 더불어 유럽연합이 지정한 생태 보호구역 나투라 2000(Natura 2000)에 속해 있다. 아프리카에서 불어오는 혹독한 모래바람과 지중해의 뜨거운 태양 속에서 형성된 크레타의 독특한 생태계를 관찰할 수 있는 최고의 장소인 셈이다. 그람부사 섬이 새들의 안식처라면 발로스 라군은 동물의 천국이다. 수영을 하다가 카레타 카레타(Caretta Caretta) 거북이나 몽크바다표범(Monk seal)과 만나게 되는 행운을 누리게 될지도 모른다.

발로스를 가는 가장 빠르고 편한 방법은 그람부사 페리를 이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육로로 가볼 것을 추천한다. 비포장도로를 약 8㎞ 달린 뒤 가파른 산길을 도보로 30여 분 내려가야 하는 다소 험난한 여정이지만 충분히 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키사모스 반도의 아름다운 절경을 파노라마로 즐길 수 있고, 트레킹을 하며 대자연의 매력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원하는 만큼 해수욕을 즐길 수 있는 것도 물론이다. 가장 큰 장점은 발로스의 석양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해가 질 무렵 절벽 중간에 마련된 전망대에 올라보자.

슬픈 역사가 담긴 바다, 엘라포니시

이번에는 크레타를 대표하는 또 다른 명소 엘라포니시(Elafonisi)로 향한다. 크레타 남서부 모서리에 있는 이 작은 섬 역시 극강의 풍경을 보유하고 있다. 특히 섬 주변에 조성된 해변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 중 하나로 선정돼 매년 여름 수만 명이 넘는 여행객의 발걸음을 이끈다. 엘라포니시란 그리스어로 ‘사슴의 섬’이란 뜻이다. 수심이 얕은 바닷물을 첨벙첨벙 건너 섬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마치 사슴처럼 보인다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엘라포니시는 ‘분홍 해변’이라는 애칭으로 더 유명하다. 해안에 산호 조각이 축적되면서 마치 모래가 분홍색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해변 전체가 분홍빛으로 가득했지만, 사람들이 기념 삼아 너도나도 한 움큼씩 가져간 탓에 현재는 많이 사라진 상태다. 잔잔하게 일렁이는 에메랄드빛 바다 위를 이곳저곳 거닐다 보니 마치 지상 낙원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티 없이 맑고, 더없이 평화로운 엘라포니시지만 그 이면에는 가슴 아픈 역사가 서려 있다. 1824년 오토만 제국 군대에 의해 크레타 시민들이 학살되는 비극이 바로 이곳에서 발생했다. 희생자 수는 약 800명으로, 여성과 어린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주차장 한쪽에 마련된 소박한 위령비가 이날의 슬픔을 기억한다. 엘라포니시에서 북쪽으로 5㎞ 정도 떨어진 곳에는 크리소스칼리티사(Chrisosklitissa) 수도원이 있다. 깎아 지르는 절벽 위에 우뚝 서 있는 붉은색의 수도원은 마치 요새를 연상케 한다.

② 요새를 연상케 하는 크리소스칼리티사 수도원.
② 요새를 연상케 하는 크리소스칼리티사 수도원.
크리소스칼리티사란 ‘금빛 계단의 성모’란 뜻이다. 수도원 정상으로 오르는 99개의 계단 중 한 개의 황금 계단이 숨어 있는데, 신을 온전히 믿는 자만 볼 수 있다는 흥미로운 전설이 숨어 있다. 북적이는 해변이 싫다면 엘라포니시 동쪽으로 약 3㎞ 떨어진 케드로다소스(Kedrodasos) 해변을 추천한다. 사막을 연상케 하는 하얀 모래사장 위로 햇빛에 뒤틀려 자란 노간주나무가 가득하다.

신들의 만찬을 즐기다

④ 아침 또는 애피타이저로 즐겨 먹는 다코스.
④ 아침 또는 애피타이저로 즐겨 먹는 다코스.
크레타 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음식이다. 크레타 음식은 세계적으로 건강하고 맛있기로 소문이 자자하다. 대표적인 전통 애피타이저로는 다코스(Dakos)와 칼리추니아(Kalitsunia)가 있다. 다코스는 물을 먹인 러스크 빵 위에 다진 토마토와 치즈, 올리브유와 오레가노를 듬뿍 뿌린 음식이다. 향긋하고 건강한 맛에 아침 식사로도 제격이다. 칼리추니아는 치즈와 각종 허브로 속을 채워 구워낸 파이다. 꿀을 곁들여 먹으면 맛이 배가 된다. 그리스 하면 흔히 페타 치즈를 떠올리지만 크레타에 왔다면 미지트라(Myzithra)와 아토티로(Athotyro)를 꼭 맛봐야 한다. 두부처럼 부드러운 식감과 섬세한 맛이 일품이다. 크레타 인들은 우리나라만큼이나 나물을 많이 먹는다. 크레타에서는 야생 나물을 호르타(Xorta)라고 부른다.

조리법은 아주 간단하다. 야생에서 채취한 각종 나물을 데친 뒤 올리브유를 듬뿍 뿌리고 소금과 레몬즙을 곁들인다. 계절마다 채취하는 호르타의 종류가 다르고 식당마다 조리법이 다르다 보니, 오늘은 어떤 호르타를 먹게 될지 기대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미노아 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달팽이 요리 호흘리(Chochli)도 별미다. 큼직한 달팽이를 올리브유에 튀기듯 익힌 뒤 로즈마리, 화이트 와인, 소금, 후추를 가미해 먹는다. 깊은 풍미와 달콤하면서 고소한 맛이 무척이나 매력적이다. 호박꽃이나 포도잎 안에 각종 허브와 쌀을 채워 넣고 돌돌 말아 구워내는 돌마다키아(Dolmadakia)도 빼놓을 수 없다.

③  크레타의 야생 나물인 호르타.
③ 크레타의 야생 나물인 호르타.
시큼한 그릭 요거트와 궁합이 특히 좋다. 푹 고아낸 닭 혹은 양고기 육수에 쌀과 스타카(Staka) 버터를 넣고 뭉근하게 끓여낸 필라피(Palifi)는 결혼이나 잔칫상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음식이다. 크레타식 파스타인 힐로피타(Xylopita)도 빼놓을 수 없다. 눅진하게 우려낸 고기 육수에 올리브유와 토마토, 오레가노 등을 잔뜩 넣고 장 칼국수처럼 졸이듯 끓여내는 것이 특징이다.

좋은 음식에 좋은 술이 빠질 수 없다. 크레타의 전통술은 라키(Raki)가 대표적이다. 포도 찌꺼기로 만든 증류주인데 따뜻하게 데운 뒤 타임 꿀을 섞어 마시기도 한다. 크레타 어느 식당을 가든, 식사 후에는 간단한 디저트와 라키를 무료로 내어오는 것이 일반적이다. 와인도 일품이다. 크레타 와인의 역사는 무려 청동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크레타 토종 포도 품종으로는 다프니(Dafni), 플리토(Plyto) 등이 있다. 특히 이라클리오와 주변산지의 와인을 최고로 친다.

하니아(그리스)=글·사진 고아라 여행작가

minstok@naver.com

▶여행정보

한국과 크레타를 잇는 직항은 없다. 아테네에서 비행기 혹은 페리를 통해 들어가야 한다. 하니아와 키사모스를 잇는 버스는 매일 14~15대 정도 운행된다. 그람부사와 발로스로 가는 페리는 성수기(5~10월)에만 운항하며 성인 기준 27유로다. 하니아와 엘라포니시를 잇는 버스는 매일 한 대가 운행된다. 오전 9시 하니아를 떠나 키사모스를 거쳐 엘라포니시에 도착한 뒤 오후 4시에 다시 돌아오는 스케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