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과장 & 이대리] 7말8초… 직장은 휴가전쟁
초여름에 접어들면서 한낮 기온이 30도를 넘어서고 있다. 날씨가 더워지면 ‘좋은 휴가 날짜’를 선점하기 위한 김과장과 이대리의 눈치작전이 치열해진다. 직장 상사를 오랜 기간 보지 않기 위해 휴가를 엇갈려 잡는 것이 ‘핵심 기술’이다. 여름휴가가 성가신 김과장 이대리도 적지 않다. 호텔과 항공사에선 여름휴가 시즌이 ‘안락한 휴식 기간’이 아니라 ‘민원 처리 특별 기간’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여름휴가를 앞둔 김과장 이대리의 고충을 들어봤다.

치열한 ‘7말8초’ 선점 경쟁

[김과장 & 이대리] 7말8초… 직장은 휴가전쟁
여름 휴가 고민은 어디를 가느냐가 아니라 언제 가느냐에서 시작된다. 시기에 따라 비행기표와 호텔비가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아이가 있는 학부모가 가장 선호하는 휴가 시기는 학교와 학원 방학에 맞춰 여행을 다녀올 수 있는 7월 말과 8월 초다.

국내 대기업 계열 중공업회사에 다니는 김 과장은 여름휴가를 앞두고 팀원들과 눈치작전을 벌이고 있다. 이 회사의 여름휴가는 2주간이다. 2주의 업무 공백을 메우려면 자신의 업무를 대신 봐줄 수 있는 팀원과 짝을 지어 교대로 휴가를 가야 한다. 어린이집, 아이 학원방학기간이 몰려 있는 7월 마지막 주 ‘황금휴가’를 누가 선점하느냐를 놓고 신경전을 벌이는 이유다.

대형 정유회사에 다니는 워킹맘 주 과장(30)은 요즘 휴가 일정을 새로 짜느라 손가락에 불이 날 지경이다. 계획이 틀어지게 된 건 직속 상사인 김 부장 때문이다. 중학생 아들을 둔 김 부장이 갑자기 7말8초에 쑥 끼어들어오면서 부원들 일정이 모두 어그러졌다. “애가 학교도 안 다니는데 다들 저렴한 비성수기에 휴가들 쓰라”는 김 부장의 생색을 들을 때면 한 대 쥐어박고 싶은 마음이다. 어린이집과 유치원도 방학기간은 학교와 똑같은데 차별받는 것 같아 서럽기도 하다.

2주짜리 여름휴가는 남의 일

전략컨설팅업체에 근무하는 김모씨(28)는 요즘 대기업에 근무하는 여자친구를 달래느라 진땀을 빼고 있다. 휴가를 가기로 했던 기간에 새로운 프로젝트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프로젝트에 들어가면 8주 동안은 주말도 반납해야 한다. 2주 이상 휴가를 간다는 대기업에 다니는 친구들의 얘기는 남의 얘기다.

경남 거제시에 있는 대형 조선소 시설관리팀 최 과장은 휴가 성수기가 두렵다. 조선소에선 8월 초 직원 대부분이 2주가량 휴가를 쓴다. 시설관리팀은 이때 1년 동안 미뤄온 도로 정비와 전기 배선 보수 작업을 해야 한다. 최 과장은 “관리팀 팀원들끼리 일정을 맞추다 보니 10월에나 휴가를 갈 수 있을 것 같다”며 “설비가 고장이라도 나면 지금 정한 일정도 무기한 연기”라고 말했다.

“후배 눈치 보는 게 더 힘들어”

국내 한 대형 유통업체에서 일하는 김 차장은 지난해 아예 여름휴가를 못 갔다. 부하직원들에게 휴가날짜를 선택하라고 해서 먼저 휴가를 보냈는데, 정작 자기가 갈 차례엔 회사에 큰일이 터져버렸다. 지난해 못 간 만큼 올해는 꼭 가고 싶지만 그렇다고 먼저 휴가 날짜를 찍을 수도 없다. 그랬다가는 금세 ‘꼰대’ 소리를 듣는다.

반도체회사 해외영업팀에 근무하는 노 과장은 올여름 친구들과 동남아 여행을 가는 계획을 세웠지만, 휴가 날짜가 언제 잡힐지 몰라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팀장과 후배들 사이에서 양쪽 눈치를 다 봐야 하기 때문이다. “윗사람 눈치 안 보고 당당하게 휴가를 쓰는 후배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얄밉기도 합니다. 휴가 떠난 후배의 몫까지 일할 때면 나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도 들고요.”

쏟아지는 민원에 ‘휴가 공포증’

항공사와 호텔에 근무하는 김과장 이대리는 쏟아지는 민원처리에 휴가 공포증을 호소하곤 한다. 1박2일 일정으로 호텔을 예약해 놓고 갑자기 2박3일로 늘려달라는 정도는 애교다. 이미 만실이어서 빈방이 없는데도 거부하기 힘든 민원은 끊이지 않는다. A호텔에 근무하는 김 과장(30)은 시어머니 친구가 부탁하는 바람에 한동안 밤잠을 설쳤다. 취소된 방이라도 나오면 잡으려고 했지만 여름철 극성수기인지라 끝내 방을 잡지 못해 원성을 들었다. 김 과장은 “예전처럼 호텔 예약을 수기로 하던 시절에는 빈방 일부를 남겨두고 예약을 받지 않기도 했지만 요즘은 100% 전산화되고 예약 여부가 온라인에서 실시간 확인되기 때문에 사실상 ‘새치기’가 어렵다”고 하소연했다.

휴가철 호텔에서 근무하다 겪는 고충은 이뿐만 아니다. 인천공항 인근 B호텔에서 일하는 이 대리(33)는 지인으로부터 주차장을 공짜로 이용하게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이 대리는 “사내 눈치를 보다 몰래 주차 도장을 찍어준다”며 “호텔 투숙객들이 주차 공간이 없다고 항의라도 하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고 한숨을 쉬었다.

항공사도 휴가철 민원이 폭주하는 곳이다. 국내 대형 항공사에 다니는 채 차장은 휴가철이면 지인들의 다양한 민원으로 골머리를 앓는다. 예전에는 성수기 비행기 티켓을 구할 수 있게 도와달라거나 공항 라운지를 이용할 수 있게 해달라는 부탁이 대부분이었다. 요즘은 휴가 시즌이 길어지면서 요청의 종류도 다양해졌다. 두 명이 여행을 가는데 창가 쪽 3열 좌석의 창가와 복도 쪽 자리를 배정하고 가운데 자리를 비워달라는 부탁도 받았다. “항공사 다니면 티켓 하나쯤은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줄 아는 사람이 많은데 전혀 그렇지 않거든요. 해당 부서에 아는 사람이 있으면 다행인데 없으면 누구한테 부탁해야 하나 답답할 뿐이죠.”

해외 주재원으로 나가 있는 직장인들은 휴가철만 되면 현지 맛집과 관광지 등을 소개해달라는 지인들 부탁으로 정신이 없다. 한 공공기관 베트남 하노이지사에 근무하는 한모 과장은 “지난 4월부터 ‘여름 휴가로 베트남에 가는데 한국인이 많이 가는 곳 말고 현지인이 주로 가는 맛집을 예약해달라’는 민원에 시달렸다”며 “사람 밥먹는 곳이 다 비슷한데 하나같이 독특하고 이색적인 식당을 원해 부담스러웠다”고 털어놨다.

김순신 기자 soonsin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