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태영호 신드롬'
2016년 7월, 영국 잉글랜드 중남부 옥스퍼드셔의 브라이즈 노턴 공군기지. 50대 동양인 부부와 26세, 19세 두 아들이 정보기관 요원들과 함께 나타났다. 이들은 대기 중이던 30인승 영국 공군기를 타고 독일로 향했다.

전투기 두 대의 호위를 받으며 도착한 곳은 독일 서남부 람슈타인 미군 공군기지였다. 이곳에서 비행기를 바꿔 탄 이 가족은 한국과 미국 정보기관의 보호 속에 무사히 서울로 왔다. 영국주재 북한 공사 태영호 씨 일가였다. 그의 귀순은 영국·미국·독일과 한국 등 4개국이 공조한 한편의 첩보 드라마였다.

당시 영국과 미국은 그에게 망명지를 어디든지 택할 수 있는 ‘백지 위임장’을 줬다. 하지만 그는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택했다. 황장엽 노동당 비서의 망명 이후 가장 비중 있는 북한 인사의 귀순이었다. 그는 여러 활동으로 ‘김씨 왕국’의 베일을 하나씩 벗겨냈다. 북한 주민의 처참한 인권에 대한 증언으로 지난해에는 국회에서 ‘올해의 인권상’도 받았다.

최근 그는 국회에서 김정은 체제를 고발하는 연설과 함께 기자간담회도 했다. 자신의 책 《3층 서기실의 암호》 출판기념회를 겸한 자리였다. “북한은 결코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김정은 체제를 똑바로 보라”고 해 북한이 ‘인간쓰레기’라는 격한 반응을 보였던 그 행사다.

미국과 북한 관계가 긴박해지면서 이 책은 요 며칠 새 국내 베스트셀러 종합 1위가 됐다. 이미 5만 권이 팔렸고, 2만 권 추가 인쇄에 들어갔다고 한다. 가히 ‘태영호 신드롬’이다. 이유가 무엇일까. 북한 실상을 알고 싶은 국민 욕구가 그만큼 크다는 의미일 것이다. 정부 쪽에서 북한의 본모습을 전하는 정보는 별로 없다. 언론도 부족하다. 개중에는 “(정부에 의해) 금서가 되기 전에 구해놓자”는 이유도 있다니 씁쓸하다. 이런 우스개 같은 말조차 그럴듯하게 활자화되는 현실이 유감이지만, 한국의 언론출판 자유도가 과연 진전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책 출간에 맞춰 그가 국가정보원 산하 안보전략연구소 자문연구위원직에서 사퇴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자진 사임’이 강조되는 게 영 걸린다. 아무튼 그로서는 고정적인 ‘밥줄’이 끊어진 셈이다. 자신을 겨눈 북한의 맹비난보다 한국 내부의 은근한 비난과 냉소가 그에게는 더 어렵고 두려울지 모른다. 어떤 경우든 그의 안전은 정부가 책임져야 한다. 그가 ‘광장의 이명준’처럼 제3국이 아니라, 이 땅에서 정착할 수 있도록 보호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허원순 논설위원 huh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