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그룹이 고민에 빠졌다. 실무진이 1년 넘게 준비하고 정부로부터 ‘OK 사인’까지 받은 개편안이 무산되면서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과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 등 오너 일가가 양도세만 1조원 이상 내는 ‘정공법’을 택했음에도 시장의 반응은 냉랭했다. 업계에서는 현대차그룹 앞에 놓여 있는 선택지가 많지 않다고 분석한다. 새 개편안이 시장의 승인을 받으면 전화위복이 될 가능성이 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만만치 않은 타격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모비스 분할법인 先상장? M&A 전략 수정?… 고민에 빠진 현대車
◆새 개편안은 언제?

현대차그룹은 지난 21일 지배구조 개편을 위한 임시 주주총회를 취소하면서 “분할·합병안을 보완·개선해 다시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증권가는 이를 현대모비스를 분할해 현대글로비스와 합병하고, 현대모비스를 지배회사로 만드는 기존 개편안의 큰 틀을 유지하겠다는 의미로 해석했다.

김진우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재추진 시나리오는 현대모비스와 현대글로비스를 중심으로 하는 기존 방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며 “다른 시나리오는 기존에 내놓은 전략과 논리를 뒤집어야 하기 때문에 부담이 크다”고 말했다.

현실적인 대안으로는 현대모비스의 분할부문을 상장한 뒤 현대글로비스와 합병하는 방안이 거론된다. 현대모비스 분할법인의 가치 평가를 시장에 맡기면 합병 비율을 둘러싼 논란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논리다.

재추진까지는 시간이 다소 걸릴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기존 개편안이 시장의 반발에 밀려 무산됐기 때문이다. 시장 분위기를 면밀히 살펴야 하는 상황이다. 게다가 새 개편안마저 시장의 벽을 넘지 못하면 현대차그룹은 한동안 지배구조 개편을 포기해야 한다.

◆엘리엇 추가 요구안 내놓나

투자은행(IB) 업계는 엘리엇매니지먼트가 조만간 추가 공세에 나설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현대차그룹의 지배구조 개편 작업에 가장 먼저 반기를 들고, 끝내 개편을 무산시켜 자신의 ‘힘’을 과시했지만 실질적으로 얻은 게 없다는 이유에서다.

업계에서는 엘리엇이 자신들이 추천하는 사외이사를 선임하라고 현대차그룹에 요구할 것으로 보고 있다.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인물을 이사회에 진출시켜 경영에 간섭하겠다는 의미다. 현대차그룹이 이미 “외국인과 여성의 이사회 진출을 매우 환영한다”고 밝힌 만큼, 이 요구는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다. 자사주 소각이나 배당 확대 등 추가적인 주주친화책을 내놓으라고 압박할 것이라는 전망도 제기된다. IB 업계 관계자는 “공개적인 공격을 하거나 현대차그룹 경영진과 개별적으로 접촉해 원하는 것을 얻어갈 수도 있다”고 말했다.

◆현대차, 미래차전략 어쩌나

현대차그룹은 지배구조 개편안을 발표하면서 대형 인수합병(M&A)을 공격적으로 시도하고, 미래자동차 기술을 확보하는 초석으로 삼겠다고 강조했다. 현대모비스를 정점에 두는 지배구조를 만든 것도 미래 기술과 투자에 집중하는 회사를 지배회사로 삼아야 한다는 판단 때문이라고 현대차그룹은 설명했다.

하지만 지배구조 개편 작업이 무산되면서 현대차그룹이 중장기전략을 일부 수정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무엇보다 이른 시일 내 대형 M&A를 추진하기는 쉽지 않다. 미래차 기술에 대한 대규모 투자가 당분간 보류될 수 있다는 관측도 많다. 회사 지배구조가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상황에서 섣불리 대규모 자금을 쏟는 결정을 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정의선 부회장 보폭 넓어지나

지배구조 개편 추진 및 무산을 계기로 정 부회장의 경영 보폭이 넓어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정 부회장이 직접 지배구조 개편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내용의 언론 인터뷰를 하고, 개편작업 무산에 대한 입장문을 낸 것만 봐도 예전과 달라졌다는 분석이다. 정 부회장은 지금까지 미래차 등 한정된 분야에 대해서만 자신의 생각을 밝혔을 뿐이다. 그룹 이슈에 대해 직접 목소리를 낸 것은 이례적이다.

시장에서는 “정 부회장이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주문도 나온다. 현대차의 미래를 책임질 정 부회장이 시장과 더 자주 소통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정 부회장도 지배구조 개편 무산에 대한 입장문을 통해 “주주들과 시장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더욱 더 폭넓게 소통하겠다”고 밝혔다.

도병욱 기자 dod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