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경영 복귀보다 성찰의 시간… '잠행' 생각보다 길어질 듯
삼성전자는 지난 23일 회사 미래와 직결된 중요한 안건 두 개를 처리했다. 우선 3년간 삼성전자 주요 경영 사안을 결정할 7명의 신임 등기이사(총 11명) 후보를 내정했다. 이어 수원 본사에서 차로 20분가량 떨어진 화성 반도체사업장에서 차세대 반도체공장이 될 ‘극자외선(EUV) 전용 파운드리(수탁생산) 공장 기공식’을 열었다. 하지만 이날 이사회와 반도체공장 기공식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삼성전자 한 관계자는 “이 부회장이 고심 끝에 참석을 포기한 것 같다”며 “당분간 공식활동은 어려워 보인다”고 전했다.

◆어디에서 뭘 하나

이 부회장이 지난 5일 항소심 재판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난 지 20일이 흘렀다. 애초 회사 임직원들과 만나 밀린 현안을 처리할 것으로 예상됐으나 그는 잠행에 잠행을 거듭하고 있다. 회사 출근은 고사하고 경영진과의 대면 접촉도 극도로 자제하고 있다는 전언이다.

근황을 조금씩 아는 지인들의 얘기를 종합해보면 이 부회장은 출소 이후에도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본인과 박근혜 전 대통령 사이에 청탁과 뇌물 수수가 이뤄졌다는 명시적 증거가 없는데도 ‘묵시적 청탁’과 ‘포괄적 뇌물’로 단죄당했고, 남은 대법원 판결에서 또다시 마음을 졸여야 하는 처지 때문만은 아니다. 자신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한 정형식 부장판사를 파면시키라는 수십만 건의 청원이 청와대 게시판에 몰린 데 따른 것만도 아니다.

한 지인은 “이 부회장은 이번 일을 계기로 자신과 삼성에 쏟아지는 많은 국민의 질시와 반감, ‘삼성전자를 국가 경제에 언제나 기여하는 기업으로 성장시켜 나가고 싶다’는 진정성을 곧이곧대로 믿어주지 않는 분위기에 더 큰 심적 고통을 받고 있다”고 전했다. 지난해 12월27일 “바닥까지 떨어져버린 기업인 이재용의 신뢰를 어떻게 되찾을지 막막하다”고 한 항소심 최후진술과 닿아 있는 말이다.

“박 전 대통령과 청와대에 경영권 승계를 위한 청탁을 한 적이 없다”, “최순실이라는 존재를 사전에 알지 못했다” 등과 같은 본인의 주장이 검찰과 시민사회 일각에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 역시 마찬가지다. 당장 이에 따른 잠재적 피해와 불이익을 걱정하기보다는 평생 이런 종류의 비판과 불신을 끌어안고 살아가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진지하게 돌아보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8월7일 1심 재판에서 “아무리 부족하고 못난 놈이라도 국민의 노후자금인 국민연금에 손을 댔겠느냐”고 호소한 최후진술과 같은 맥락이다.

◆삼성 후계자로서의 숙명은

이 부회장과 시민사회 일각의 불화는 오래전 시작됐다. 삼성그룹이 1996년 삼성에버랜드(현 삼성물산)의 전환사채(CB) 발행과 1999년 삼성SDS의 신주인수권부사채(BW) 발행을 통해 그룹 경영권 승계 준비를 본격화하면서다. 본인 의사와 무관하게 진행됐고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까지 받았지만, 결과적으로 본인이 경영권을 물려받는 수혜자가 됐다는 점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도 속이 편하진 않았다고 한다. 2000년대 들어 삼성전자 임원이 되자 과거 삼성그룹 2인자이던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에게 “왜 어린 저에게 이렇게 가혹한 굴레를 씌웠느냐”고 원망을 털어놓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이 부회장은 그 시절 자신에게 형성된 부정적 이미지가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여긴다. 2016년 말 “박 전 대통령에게 경영권 승계를 청탁하기 위해 뇌물을 줬다”는 특검 측 주장이 나왔을 때 그는 가까운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런 얘기를 들어야 하는 것이 제가 감당해야 할 숙명인가 봅니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너무 힘이 듭니다.”

이런 심정을 잘 아는 삼성전자 고위 경영진은 “이 부회장이 당장 경영활동을 본격화하거나 끊어진 해외 비즈니스 인맥을 복원하는 일을 서두르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달 22일로 예정된 삼성물산 창립 80주년 행사나 그다음 날(23일)로 계획된 삼성전자 정기 주주총회에도 이 부회장이 나설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한다. 과거 수감생활에서 풀려난 기업총수들처럼 의례적으로 대규모 투자와 고용, 사회공헌 계획을 발표할 것이라는 예상도 번지수를 잘못 짚었다는 것이다.

삼성 계열사의 한 최고경영자는 “이 부회장은 할아버지(이병철 삼성 창업주)와 아버지(이건희 삼성 회장)를 좇아 초일류 기업의 리더로 인정받고 싶어 하지만, 당장 실현되기 어렵다는 현실도 냉정하게 인식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이 부회장이 ‘지난 1년은 저를 돌아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밝힌 5일 출소 소감에 향후 행보가 담겨 있다”고 말했다. 고통스럽고 지루하지만, 스스로 꿈꿔 온 기업인으로 성장하기 위한 자기성찰이 상당기간 이어질 것 같다는 얘기다.

좌동욱 기자 leftki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