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추행 파문을 일으킨 이윤택 연극연출가가 19일 기자회견에서 피해자들에게 사과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다.  /연합뉴스
성추행 파문을 일으킨 이윤택 연극연출가가 19일 기자회견에서 피해자들에게 사과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다. /연합뉴스
이윤택 극작가 겸 연출가(전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66)가 그동안 배우들에게 행사한 성폭력에 대해 19일 공개적으로 사과했다. 20년 가까이 한 상습적 추행은 인정했지만 강제성 있는 성폭행 의혹은 부인해 논란이 증폭되고 있다. 현장 연극인들은 “진정성 없는 사과이자 2차 가해”라며 반발했다. 한국극작가협회 한국연극연출가협회 등 연극 관련 단체들은 이씨를 제명하기로 결의했다. 이씨가 이끌던 연극집단인 연희단거리패는 이날 해체한다고 밝혔다.

이씨는 이날 서울 명륜동 30스튜디오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피해를 본 당사자들에게 진심으로 사죄한다”며 “제 죄에 대해 법적 책임을 포함해 그 어떤 벌도 달게 받겠다”고 했다. 김수희 극단 미인 대표가 10여 년 전 이씨에게 당한 성추행 정황을 지난 14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공개해 연극계 ‘미 투(me too·나도 당했다)’ 운동에 불을 댕긴 지 5일 만이다. 김 대표의 폭로 이후 여러 배우가 SNS와 연극 관련 인터넷 게시판 등에 그로부터 당한 추행과 성폭행 등의 실상을 쏟아냈다.

이윤택 사과 기자회견장에서 한 연극인이 항의문구를 들어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이윤택 사과 기자회견장에서 한 연극인이 항의문구를 들어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이씨는 배우들에게 자신의 성기 주변을 안마하게 하거나 연기 훈련을 명목으로 배우의 가슴과 배 등에 부적절하게 접촉한 사실을 인정했다. 그는 그러나 “극단 내에서 18년간 관습적으로 일어난 아주 나쁜 형태의 일이었다”며 자신을 쏙 빼놓고 얘기하는 이른바 ‘유체이탈’ 화법을 구사해 공분을 샀다. 그는 “어떨 때는 나쁜 짓인지 모르고 저질렀을 수도 있고 어떤 때는 죄의식을 가지면서 제 더러운 욕망을 억제할 수 없었을 수도 있다”고 했다.

성폭행 의혹은 부인했다. 그는 “성관계 자체는 있었지만 폭력적이고 물리적인 방법으로 강제로 이뤄지지 않았다”며 “이 문제의 진위를 이 자리에서 밝힐 수는 없어 법적 절차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어 “사실과 진실에 따라 판단해야 하지 않겠냐”며 “법적 절차에 따라 진실이 밝혀지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그가 이끌던 극단 연희단거리패 구성원들의 조직적인 은폐나 방조 의혹에는 선을 그었다. “많은 단원은 이런 이야기 자체와 거리가 있었고 (추행을 아는) 일부 단원은 제게 끊임없이 항의하고 문제제기했다”며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매번 약속했지만 내가 나 자신을 다스리지 못했다”고 말했다.

연희단거리패는 이날 해체하기로 했다. 김소희 연희단거리패 대표는 그동안 이씨의 추행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인정하면서도 “이전엔 그게 성폭력이라는 인식을 하지 못했다”고 했다.

이날 여러 연극 관련 단체는 이씨를 연극계에서 퇴출시킨다고 밝혔다. 한국극작가협회가 지난 17일 이씨를 협회에서 제명한 데 이어 한국연극연출가협회와 서울연극협회도 이씨를 영구 제명한다고 이날 발표했다. 서울연극협회는 “17일 긴급 이사회에서 이윤택 회원의 성폭력 사실을 묵과할 수 없는 심각한 범죄행위로 정의하고 정관에 따라 최고 징계 조치인 제명을 결정했다”고 했다.

이씨의 공식 사과에도 그를 규탄하는 목소리는 더욱 커지고 있다. 17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연극인 이윤택 씨의 상습 성폭행, 성폭력 피의사실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과 조사를 촉구합니다’라는 글에 함께 청원한 국민은 이날 2만5000명을 넘겼다. 연극인들의 분노도 들끓고 있다. 이씨의 기자회견장에 온 배우 홍예원 씨는 “피해 당사자에 대한 사과 없이 언론에 일방적으로 입장을 발표하는 것 자체가 2차 가해”라며 “성폭행 의혹에 대한 답변은 사실상 ‘술 마시고 운전하긴 했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다’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고 비판했다.

설유진 극단 907 대표는 “성폭행이 아닌 합의하의 성관계라는 주장은 이 연출이 수십년간 자신의 권력과 영향력을 어떻게 활용하며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며 “단순히 남성과 여성의 구도에서가 아니라 힘과 권력의 문제라는 관점에서 봐야 한다”고 말했다.

20여 명의 연극인은 피해자 지지와 가해자 처벌 촉구를 위해 연극인 회의 모임을 구성했다. 지난주 결성된 이 모임은 21일 변호사와 함께 만나 향후 대책을 논의할 계획이다.

마지혜 기자 loo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