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수입세탁기에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를 발동해달라고 요청한 자국 기업 월풀의 청원을 100% 수용하는 결정을 내렸다. 지난해 4월 미국 태양광전지 제조업체 수니바가 국제무역위원회(ITC)에 제기한 청원도 그대로 받아들였다. 자유무역에 역행한다는 국제적 비판도 아랑곳하지 않고 16년 만에 세이프가드 발동을 강행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트럼프 행정부의 세이프가드 발동이 글로벌 무역전쟁의 포성을 울렸다”고 보도했다.
미국 기업 민원 해결사로 나선 트럼프
미 무역대표부(USTR)는 22일(현지시간) 트럼프 대통령이 수입 세탁기와 태양광 패널에 대해 세이프가드 발동을 권고한 ITC의 의견을 받아들이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미국 수출 1, 2위인 삼성전자와 LG전자는 큰 타격을 받게 됐다. 수입 세탁기 물량 중 120만 대까지는 16~20%, 120만 대 초과 물량엔 40~50%의 관세가 3년간 부과되기 때문이다. 세탁기 부품에도 40~50%의 관세가 매겨진다. 또 중국과 한국 등에서 수입한 태양광 패널 제품에는 발전량 2.5GW를 초과하면 △규제 1년차 30% △2년차 25% △3년차 20% △4년차에 15%의 관세가 매겨진다.

국내외 통상 전문가들은 이번 세이프가드 조치가 미국의 통상 압력이 확대되는 신호탄이 될 것이라는 우려를 내놓고 있다. 세탁기 세이프가드 조치는 미국 1위 가전업체 월풀의 청원으로 시작됐다. 트럼프 행정부가 월풀이 요구한 제재 수준을 대부분 받아들이면서 다른 미국 기업들도 비슷한 요청을 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 무성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ITC가 지난해 말 보낸 세탁기 세이프가드 권고안(120만 대까지 무관세 또는 15~20% 관세) 중 가장 강력한 수입 규제안을 선택했다.

미국 정부는 또 국제무역위원회(ITC) 권고안과 달리 한국에서 제조한 세탁기도 세이프가드 대상에 포함시켰다. 한국 기업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이번 결정은 미국 소비자와 노동자에게 엄청난 손실”이라며 “모든 소비자의 부담이 커지는 동시에 선택은 좁아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삼성전자와 LG전자가 미국에 수출하는 세탁기는 연간 280만 대다. 10억달러 규모다. 한화큐셀과 LG전자, 현대중공업그린에너지 등 국내 태양광 업체들도 “미국 수출이 올스톱될 위기에 놓였다”며 걱정이 태산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따라 그동안 관세 없이 수출하던 태양광 제품에 최대 30%에 달하는 관세가 붙으면 어떤 업체도 가격경쟁력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미국 기업 민원 해결사로 나선 트럼프
2016년 기준 대미 태양광 셀·모듈 수출액은 12억9960만달러(약 1조3904억원)에 달했다. 국내에서 생산된 제품의 68%가 미국으로 수출됐다. 수출액으로는 말레이시아(24억5300만달러), 중국(14억9710만달러)에 이어 세 번째다. 관세율도 미국 ITC가 지난해 10월 발표한 권고안 가운데 두 번째로 높은 수준이다.

‘설마설마하던’ 세이프가드 발동이 현실화하면서 국내 다른 업종·기업들의 불안감도 깊어지고 있다. 이미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통상압력은 전방위로 나타나고 있다. 한국산 유정용 강관과 페트병 등 철강과 화학 제품에 반덤핑·상계관세를 부과하기 위한 조사를 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수출하는 메모리 반도체는 자국 기업의 특허를 침해했다는 이유로 수입을 금지하는 방안까지 검토하고 있다. 미국 정부는 또 자동차 부문의 무역역조를 시정해야 한다는 이유로 한·미 FTA 개정을 요구해 재협상이 시작된 상태다.

이에 따라 미국 보호무역 정책의 최대 피해국이 한국이 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미국의 무역 전문연구소인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PIIE)가 지난해 6월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미국 정부가 조사하거나 검토하고 있는 무역 규제가 현실화하면 영향을 받게 되는 한국의 대미 수출액은 총 89억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정됐다. 이는 2016년 미국이 한국으로부터 수입하는 금액(699억달러)의 12.2%에 달하는 것이다.

당시 보고서엔 포함되지 않은 세이프가드까지 포함하면 비중은 12.4%까지 늘어난다. 이 경우 한국은 미국에 수출하는 국가 가운데 통상 규제를 가장 많이 받는 국가로 올라선다. 대미 최대 수출국인 중국의 통상규제 비율은 같은 기준으로 10.9%에 그쳤다. 대미 무역흑자가 한국의 세 배 규모인 일본은 4.9%에 불과했다.

이처럼 한국의 주력 산업에 미국의 제재가 집중되는 요인은 복합적이다. 우선 중국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중국은 대미 최대 수출국으로 2016년 총 4628억달러를 수출하면서 3470억달러의 무역흑자를 남겼다.

안덕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이 같은 상황에서 미국이 철강, 화학 부문의 중국 기업들을 규제하면서 한국의 수출기업까지 덩달아 피해를 보는 사례가 많다”고 설명했다. 무역협회에 따르면 한국이 미국으로부터 받는 반덤핑 규제 21건 중 14건(67%)이 중국과 동일한 품목이다.

한국 기업들의 글로벌 경쟁력이 높아지면서 미국과 첨예하게 경쟁하는 분야도 늘어나고 있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스마트폰, 인공지능, 빅데이터 등 신산업에서 애플 구글 아마존 등 실리콘밸리의 혁신 기업들과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는 제너럴모터스(GM) 포드 등의 시장을 잠식하고 있다.

물론 트럼프 행정부의 보호무역주의가 최종적으로 중국을 겨냥한 것이라는 점에는 국내외 통상 전문가들도 대체로 수긍하고 있다. 백악관 관계자도 이날 “중국 태양광 패널 산업을 보면 이들이 어떻게 정부 지원을 받아 과잉생산을 하고 미국과 세계에 해를 끼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세이프가드

safeguard. 긴급수입제한조치. 특정 제품의 수입이 급증해 자국 산업에 큰 피해가 생기거나 그럴 우려가 있다고 판단될 때 해당 제품의 관세를 인상하거나 수입량을 제한하는 조치다.

워싱턴=박수진 특파원/좌동욱/김보형 기자 ps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