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가까이 사법부를 흔들었던 이른바 ‘판사 블랙리스트’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최종 확인됐다. 법원 추가조사위원회(위원장 민중기 서울고법 부장판사)는 22일 “정당한 절차 없이 일부 판사 동향을 파악한 문건을 다수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추가조사위는 “블랙리스트 개념에 논란이 있으므로 그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법조계는 블랙리스트가 없음을 추가조사위가 사실상 시인한 셈이라고 해석했다. 당사자 동의 없이 PC 강제 개봉 등 추가조사를 허용했던 김명수 대법원장은 사법부 내홍을 봉합해야 하는 무거운 과제를 떠안았다. 국제인권법연구회를 중심으로 한 일부 진보성향 판사들의 입지도 크게 좁아질 전망이다.

PC 강제로 열었지만… '판사 블랙리스트'는 없었다
◆“판사동향 파악한 문건 여럿 발견”

추가조사위가 이날 공개한 문건은 크게 △판사 소모임 활동내용 파악 및 대응 △판사회의 의장 경선 및 사법행정위원회 추천 과정 △일부 법관 동향 파악 및 포털 사이트 게시판 현황 보고 △2015년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항소심 재판부 동향 등으로 나뉜다.

추가조사위는 “법원행정처가 사법 불신에 대한 대응, 법원장의 사법행정권 행사 보완 등을 이유로 가능한 공식적 비공식적 방법을 모두 동원해 법원 운영과 법관의 업무뿐만 아니라 그 이외의 영역도 광범위하게 정보수집을 해온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이어 “특정연구회 소속 법관들을 핵심그룹으로 분류해 그 활동을 자세히 분석하고 이념적 성향과 행태적 특성까지 파악해 대응 방안을 마련한 것은 법관의 연구활동에 대한 사법행정권의 지나친 개입으로 볼 수 있다”고 우려했다.

하지만 블랙리스트 존재 여부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지난해 11월 추가조사위가 블랙리스트 실체를 밝히기 위해 출범한 것을 감안하면 그동안 의혹을 뒷받침할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는 점을 자인한 셈이다.

◆법원, 개혁·내부봉합 2중 과제 떠안아

대법원은 지난해 3월 블랙리스트 의혹이 불거지자 다음달 진상조사위를 꾸려 조사했지만 근거를 찾지 못했다. 작년 9월 취임한 김 대법원장은 일부 판사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추가조사위를 출범시켰다. 법원행정처 PC 4대를 열어 본 추가조사위는 결국 블랙리스트로 단정 지을 문서는 발견하지 못했다.

조사 결과에 따라 자칫 형사 문제로 번질 가능성을 우려했던 법원은 일단 안도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김 대법원장은 큰 부담을 안게 됐다. 조사 결과와 과정 등을 두고 여전히 평가가 엇갈려 갈등이 쉽사리 가라앉긴 어려워 보인다는 게 법원 안팎의 분석이다.

당장 김 대법원장은 조사 결과를 토대로 보완책을 마련하고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을 세우는 일이 시급해졌다. 법원행정처의 대대적 개편도 불가피하게 됐다. 우선 행정처 기능을 대법원장의 사법행정 보좌와 일선 재판업무 지원으로 한정하고, 인력도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작년부터 문제를 공론화한 소장 판사들은 적잖은 타격을 입었다는 평가다. 위법성 논란을 무릅쓰고 컴퓨터를 강제로 확보해 조사해 놓고도 당초 제기한 블랙리스트 의혹과는 직접 관련이 없는 문건만 내놓은 것은 ‘조사 결과를 정당화하려는 의도’라는 비판도 나온다. 서울 지역의 한 판사는 “애초부터 무리한 조사였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고 지적했다.

이상엽 기자 ls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