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기자 칼럼] 독일에 '갑을관계'가 없는 까닭
독일엔 ‘갑을관계’가 없다. 독일 완제품업체들도 국제 무대에서 일본 한국 등과 치열하게 경쟁한다. 부품 단가에 민감한 것은 한국과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갑을관계가 없는 것은 중소기업의 뛰어난 기술력 덕분이다.

특정 기술면에서 대기업보다 우수한 게 중견기업이고, 그보다 더 뛰어난 게 중소기업이다. 예컨대 자동차용 센서 등 특정 부품의 세계 시장을 지배하는 중소기업으로부터 중견기업이 이를 공급받지 못하면 완성차업체에 모듈을 공급하지 못한다. 그러니 갑을관계가 성립할 수 없다. 대·중소기업 간 양극화가 극심하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다.

'상향식 정책'이 경쟁력 원천

독일은 어떤 정책을 펴길래 강소기업이 많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개별 기업을 지원하는 중소기업정책은 찾아보기 힘들다. 연방정부 차원의 ‘중소기업’이라는 정의 자체가 없다. 본에 있는 ‘중소기업연구소’가 정한 ‘미텔슈탄트(중견·중소기업)’라는 기준이 있을 뿐이다. 인력이 500명을 넘지 않고 매출이 5000만유로 미만인 기업이다. 연방정부는 필요 시 이를 원용한다. 2012년 기준 미텔슈탄트는 365만 개, 종사자 수는 1597만 명이다. 사업체 수의 99.6%, 종사자의 59.4%를 차지한다.

왜 독일에선 갑을관계와 양극화 문제가 없을까. 한국의 중소벤처기업부가 본격 활동에 들어간 것을 계기로 이 문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강소기업을 키우지 않으면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독일 정책의 특징은 ‘상향식(bottom-up)’이라는 점이다. ‘현장중심’이라는 의미다.

기업의 연구개발을 지원하는 프라운호퍼연구소도 정부 지시로 설립되는 게 아니다. 각 지역의 공과대학과 기업들이 ‘우리 지역에 이런 연구소가 필요하다’고 제안하면 심사 후 설치한다. 프라운호퍼연구소는 전국에 67개, 약 2만4000명의 연구원을 두고 기업을 밀착 지원한다. 프라운호퍼는 ‘기업이 원하는 것’을 개발해 준다.

국가의 연구개발시스템도 상향식이다. 정부가 개별 기업을 지원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연구소와 기업들이 협력해 ‘공통기술’을 개발하는 경우에 지원한다. 그 연결통로에 ‘독일산업연구조합연합회(AiF)’가 있다.

공통과제 중심 R&D 시급

중소기업연구원의 김광희 박사에 따르면 AiF는 5만여 개의 중소기업을 대표하는 100여 개의 산업연구조합(IGF)과 1250여 개의 협약연구기관으로 구성돼 있다. 중소기업들이 이 조합을 통해 AiF에 기술개발을 제안하면 AiF가 제안서를 평가한 뒤 연방경제기술부에 지원금을 요청한다. 승인이 나면 연구기관들과 협력해 공동으로 연구를 수행한다.

2011년 1억3500만유로였던 산업연구조합 지원 예산은 2012년 1억4150만유로로 늘었고 2012년 기준 수혜 기업은 1만5553개에 이른다. 연구개발 과제는 특정 기업에 일방적으로 유리하지 않은 공통기반기술이다. ‘경쟁전단계(pre-competition)기술’이다. 이 기술은 관련 기업들이 공유할 수 있다. 상용화기술 개발은 각자 몫이다.

조병선 한국가족기업연구원장은 “독일 기업이 강한 데는 인력양성제도와 관계형 금융 등 여러 가지 요인이 있지만 상향식 연구개발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한국은 ‘하향식’ 연구개발과 정부 주도 정책이 지배해온 사회다. 이젠 이 시스템을 재고해볼 때가 됐다. 중소기업을 독일식 강소기업으로 키우고 갑을관계와 양극화를 없애기 위해서라도 상향식 연구개발과 ‘공통기술개발·공유시스템’의 활성화를 본격 논의할 때가 됐다.

김낙훈 중소기업전문기자 n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