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거일 칼럼] 기밀을 지키지 못하는 나라
1943년 2월 미국 육군 공안부장인 카터 클라크 대령은 독자적으로 러시아의 암호 전문(電文)을 조사하는 ‘베노나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미국에는 러시아의 첩보활동을 감시하는 기구가 없었고, 프랭클린 루스벨트 정권과 언론은 러시아에 대한 미국 여론을 호의적으로 만드는 데 열중했다.

이 사업의 요원들은 미국 정부가 관행적으로 확보한 전문을 해독하려 했다. 그러나 러시아 대사관이 본국과 교신한 암호 전문들은 이론적으로는 해독이 불가능한 ‘일회성 암호통신(one-time pad)’ 방식이어서 2차 대전이 끝난 뒤에야 일부가 해독됐다. 그 전문들은 러시아 첩자들이 미국 정부 깊숙이 침투했다는 것을 보여줬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보좌관까지 러시아 첩자였고 원자탄 기술도 이미 1944년 러시아에 넘어갔음이 드러났다.

그러나 육군 참모총장 오마 브래들리 장군은 이 정보를 대통령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백악관에 들어간 정보는 조만간 누설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베노나 사업’은 냉전이 끝난 1995년에 비로소 공개됐다. 냉전의 구도와 전개에 관해 역사가들이 알아야 할 정보라는 지적을 받아들인 것이다. 실제로, 미국의 좌파 언론과 지식인들은 ‘매카시즘’을 들먹이면서 러시아 첩자들을 줄곧 옹호했다.

기밀은 그런 것이다. 새어 나갈 위험이 있으면 대통령에게도 보고해선 안 된다. 꼭 공개해야 할 이유가 없는 한 기밀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새어 나가선 안 된다. 적의 기밀을 탐지하면 탐지했다는 것을 적이 알지 못하게 하는 일이 무엇보다 긴요하다.

얼마 전 국가정보원의 서버를 비밀취급 인가를 받지 않은 민간인들이 열었다. 적국에 점령당하지 않은 국가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경우를 나는 듣지 못했다. 이제 국정원은 실질적으로 정보기관이기를 멈췄다. 서버가 열린 순간, 국정원은 육신을 잃었다. 그것을 연 민간인들에게 사후에, 그것도 신원 확인을 하지 않고 비밀취급 인가를 내준 순간, 국정원은 영혼을 잃었다.

이제 대한민국에 기밀은 없다. 유성옥 전 국정원 심리전단장은 구속되기 하루 전 조선일보와의 대담에서 말했다. “제가 검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을 때 (국정원 기밀들이) 통째로 검사 책상 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제가 ‘이런 문건이 어떻게 여기에 있을 수 있느냐’고 하니까, 담당 검사도 공감했습니다.” 국정원만 그런 것이 아니다. 국군은 아예 비밀 작전계획들을 통째로 북한군에 털렸다.

이런 상황은 어떻게 수습해야 하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수습(收拾)’이란 말에 담겼다. 수습은 어지러운 것들을 주워서 가지런히 하는 것이다. 기밀은 새어 나가면 끝인데, 무엇을 주워 가지런히 하겠는가.

바로 그런 사정에 답이 있다. 이제 대한민국엔 국가 기밀이라 할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이 수습의 첫걸음이다. ‘정직은 최선의 방책’이라는 서양 격언은 지금 경우에 특히 적절하다. 이제 정부는, 특히 정보기관들과 군대는 대한민국엔 기밀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맞춰 행동해야 한다.

홧김에 놓는 어깃장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진지한 얘기다. 북한이나 중국으로 새어 나간 기밀을 기밀로 여기면 적국들은 다 아는 정보를 우리 당국자들만 모르는 상황이 나온다. 그런 상황만은 피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은 정보와 군사 작전에선 더욱 현실적 방안이다. 적이 우리 기밀을 알아서 보는 피해는 적이 우리 기밀을 모르리라는 믿음으로 보는 피해보다는 훨씬 적다. 2차 대전에서 독일과 일본이 입은 결정적 피해는 바로 그런 어리석은 믿음에서 나왔다. 만일 독일과 일본이 자신들의 암호가 연합국에 의해 해독됐을 가능성을 고려해서 작전을 폈다면 아마도 독일은 영국과 러시아를 굴복시켰을 것이고, 일본도 미드웨이 해전에서 이겨 태평양에서의 우위를 오래 유지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대한민국이 기밀을 지킬 수 없는 나라며 미국을 비롯한 우방들이 우리에게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 맞춰 행동해야 한다.

복거일 < 사회평론가·소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