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적은 오늘의 동지.”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글로벌 정보기술(IT) 기업들이 새로운 동맹 관계를 만들어가고 있다. 인텔과 AMD처럼 30년 넘은 ‘앙숙’이 손을 잡는 일까지 벌어졌다. 인공지능(AI)과 사물인터넷(IoT), 클라우드가 지배하는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기 위한 움직임이다. 한국에서도 네이버와 카카오의 AI 플랫폼을 중심으로 동맹 관계가 만들어지고 있다.
Getty Images B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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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아성 ‘윈텔’ 동맹 깨져

세계 최대 통신칩셋 업체인 퀄컴은 마이크로소프트(MS)와 손잡고 내년 초 자사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스냅드래곤 835를 장착한 윈도10 노트북PC를 선보인다. 이 노트북은 스마트폰처럼 LTE(4세대 이동통신)를 통해 언제나 네트워크에 접속할 수 있다. 퀄컴은 PC용 프로세서 시장에 진출함으로써 오랫동안 PC 시장을 주도해온 인텔의 아성에 도전할 수 있게 됐다. 또 MS와의 협업으로 연구개발(R&D) 분야에서 수익을 낼 기회를 얻게 됐다.

이번 프로젝트는 그동안 MS와 협력 관계를 유지해온 칩 제조사 인텔, AMD 등에 새로운 변화를 일으킬 것으로 예상된다. MS와 인텔은 수십년간 PC의 핵심 운영체제(OS)와 중앙처리장치(CPU) 업계에서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며 ‘윈텔(윈도+인텔)’ 동맹을 구축해왔다.
인공지능·IoT·클라우드… 거세지는 4차 산업혁명
CPU 시장의 절대 강자로 군림해온 인텔도 새로운 시대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다. 인텔은 지난달 자사 프로세서에 경쟁사인 AMD의 ‘라데온’ 그래픽처리장치(GPU)를 탑재한다고 발표했다.

두 회사는 1982년 AMD가 인텔의 라이선스를 얻어 CPU를 생산하기 시작한 이래로 30년 넘게 ‘앙숙 관계’였다. 이번 협력은 업계에서 ‘적과의 동침’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인텔이 AMD와 손을 잡은 이유는 AI, 자율주행 자동차 등 인텔이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추진 중인 분야에서 엔비디아가 강력한 경쟁자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엔비디아는 GPU 기술을 바탕으로 인텔의 아성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인텔은 내년 평창동계올림픽에서 5G(5세대 이동통신) 기술도 선보일 계획이다. 인텔은 방대한 데이터 처리를 위해 모뎀 칩셋 개발에 힘쓰고 있다. 애플 아이폰에 모뎀 칩셋의 탑재 비중이 커지는 등 기존 강자인 퀄컴과의 경쟁 구도 역시 한층 치열해질 전망이다.

AI 주도권 경쟁하는 구글-아마존

AI와 클라우드 시장을 둘러싼 아마존과 구글의 대립 구도 역시 뚜렷해지고 있다. 아마존이 클라우드, 소프트웨어, 콘텐츠 등 사업을 다각화하면서 빠르게 성장함에 따라 IT 업계의 새로운 강자로 급부상했기 때문이다.

특히 아마존이 내놓은 AI 플랫폼 ‘알렉사’와 이를 탑재한 AI 스피커 ‘에코’ 시리즈가 시장을 주도하면서 아마존과 이를 저지하려는 구글이 서로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아마존은 MS와 AI 플랫폼 동맹을 맺었다. 지난 8월 알렉사를 마이크로소프트의 AI 음성비서 ‘코타나’와 연동하기로 했다. 전자상거래 분야에 강점을 가진 아마존과 이메일, 일정관리 등 업무 용도에 강한 코타나를 연동해 시장 영향력을 높인다는 계획이다. 구글은 AI 플랫폼 ‘구글 어시스턴트’로 시장에 도전장을 낸 상태다.

구글도 클라우드 시장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아마존을 견제하기 위해 시스코와 파트너십을 맺었다. 구글은 시스코가 보유한 글로벌 기업 고객과 접점을 늘릴 수 있고, 시스코는 고객에게 구글이 보유한 첨단 기술을 제공할 수 있게 됐다. 두 회사는 향후 하이브리드 클라우드 개발을 위해 공동투자할 계획이다. 내년 2분기 본격적인 서비스를 선보인다.

아마존은 2006년 클라우드 전문 자회사 아마존웹서비스(AWS)를 만들어 이 시장에서 최대 점유율을 갖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가트너에 따르면 지난해 말 AWS의 시장점유율은 44.2%로 2위인 MS의 점유율(7.1%)보다 여섯 배 크다.

아마존이 지난 8월 미국 최대 유기농 식품 유통업체 홀푸드를 인수하며 오프라인 시장을 강화하자 구글은 미국 최대 유통업체인 월마트와 온라인 시장에서 힘을 합치기로 했다. 구글의 AI 스피커를 통해 월마트 제품을 구입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한국에서도 네이버와 카카오를 축으로 하는 AI 진영이 만들어지고 있다. 네이버는 LG전자, LG유플러스 등과 손잡고 자사의 AI 플랫폼 ‘클로바’를 확산시키고 있다. 대우건설과 협약을 맺고 푸르지오 아파트에도 클로바를 넣기로 했다. 카카오는 삼성전자, 현대차, 롯데정보통신 등 다양한 회사와 동맹을 맺고 AI 플랫폼 ‘카카오아이(i)’의 적용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이 같은 ‘이합집산’이 계속되는 이유는 AI 시대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것이다.

순다 피차이 구글 최고경영자(CEO)는 지난해 “모바일 퍼스트 다음은 AI 퍼스트”라고 말한 바 있다. AI 플랫폼을 중심으로 하는 생태계에서 벗어날 경우 한순간에 도태될 수 있다는 불안감도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이승우 기자 lees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