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IST 학부생들이 한 강의실에서 투명 칠판에 수학 공식을 적으며 토론하고 있다.  /KAIST 제공
KAIST 학부생들이 한 강의실에서 투명 칠판에 수학 공식을 적으며 토론하고 있다. /KAIST 제공
“1980~1990년대 화학공학과에서 가르치는 과목으로는 더는 학생을 가르치기 힘들어졌습니다. 당시에는 석유화학 중심의 교과목을 가르치면 됐지만 지금의 화학공학에서 가르쳐야 할 지식 범위가 그보다 다섯 배 이상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김종득 KAIST 생명화학공학과 명예교수는 지난 15일 대전 유성 KAIST 캠퍼스에서 기자와 만나 “급격한 기술의 융합으로 전통적인 화학공학의 경계가 급격히 무너지고 있다”고 말했다. 원유에서 추출하던 석유화학 제품 원료를 유전자를 변형한 세포에서 얻는 시대가 열리면서 화학공학의 경계가 점점 모호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쉘과 엑슨 같은 글로벌 기업은 물론 국내 기업들도 전통적인 석유화학 분야에 대한 투자를 줄이고 새로운 먹거리 발굴에 나서고 있다. 이런 상황은 화학공학 분야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거의 모든 이공계 학문의 경계가 점점 모호해지고 있다.

KAIST는 이런 시대를 대비해 최근 몇 가지 실험을 구상하고 있다. 기초과학 실력과 인문학적 소양이 튼튼한 융합형 인재를 기르는 학부를 신설하고 이에 맞는 새로운 커리큘럼을 개설하는 것이 목표다.
KAIST의 '무학과 실험'… "전공 장벽 허물어 융합 인재 키운다"
◆융합 교육 통해 학부 경쟁력 강화

지난 10월 세계적 대학평가기관인 QS가 발표한 아시아 대학 순위에서 싱가포르 난양공대와 싱가포르국립대는 각각 1위와 2위를 차지했다. 싱가포르 대학들은 대학원은 물론 학부 교육에 집중하며 최근 수년 새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같은 평가에서 KAIST는 지난해 6위, 올해는 4위에 올랐다. KAIST 내부에선 그간 투자가 대학원 중심으로 편중되면서 학부 교육 약화로 이어진 결과라는 반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기존의 전공 체계만으로 급격한 기술 융합의 시대에 대응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많다.

KAIST가 이르면 2019년쯤 추진하는 융합기초학부도 이런 고민에서 나왔다. KAIST에는 매년 800여 명의 신입생이 입학한다. 학생들은 1학년 때는 기본교양을 배우고 2학년 때부터 16개 전공 중 자신이 원하는 전공을 선택해 공부한다. 반면 새로 추진하는 융합기초학부는 이런 전공 없이 철저히 기초 이론과 실험 중심으로 운영된다. 특정 전공에 얽매이지 않고 창의적 사고와 평행적 사고를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꼭 배워야 하는 과목도 ‘현대물리학’과 ‘분자생물학’ ‘수학 모델링’ ‘유기화학’ 등 모든 공학에서 반드시 필요한 기초 과학 중심으로 편성했다. 지금은 전자회사 엔지니어가 화학식을 몰라도 되지만 융합이 강조되는 시대에는 다양한 전문지식을 가진 엔지니어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인공지능(AI) 시대에 필요한 고급 프로그래밍 과목과 엔지니어로서 기술의 경제성을 항상 염두에 두도록 경영학 과목도 포함될 예정이다.

무엇보다 학부생연구프로그램(URP)에 중점을 두기로 했다. 학년마다 1주일에 이틀은 하루종일 실험실에서 이론과 실기가 결합된 연구를 수행한다. 김 교수는 “실험은 이론을 검증하고 창의력을 발휘하고 키우는 데 최적의 수업 방식”이라고 말했다. 또 4학년에는 한 학기 동안 기업이나 주변 연구기관 등에서 인턴십을 받고 오면 학점을 인정하는 방안을 추진한다. 싱가포르국립대나 네덜란드 에라스무스대 등 혁신적인 대학들도 국내외 인턴십 프로그램을 통해 학생들의 경험을 확대하고 있다.

◆공대생 기초과학 교육 확대

KAIST에서 학부 교육 개편의 필요성이 제기된 건 처음이 아니다. 하지만 올초 신성철 총장이 취임하면서 본격적인 검토에 들어갔다. 신 총장은 취임하면서 “4차 산업혁명 시대에 필요한 인재를 키우기 위해 어느 분야에나 진출할 수 있고 인문학적 교양을 쌓은 융합이학사와 융합공학사를 양성하겠다”고 밝혔다.

KAIST보다 앞서 운영을 시작한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의 기초학부 제도가 벤치마킹 모델이 됐다. DGIST는 2014년부터 국내 대학으로는 처음으로 학부에 전공을 없애고 기초 단일학과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학부생은 3학년까지 기초과학과 공학, 협업 프로그램을 배우고 4학년부터는 대학원 진학과 유학, 창업 및 취업, 비이공계 분야로의 진출 등 맞춤형 진로 교육을 받는다. 손동현 성균관대 교수는 지난 9월 열린 외부 평가위원회에서 “‘무전공’ 융합 교육 과정은 디지털 혁명으로 기술 간 융합이 확산되는 상황에서 필요한 교육 수요를 충족시키고 있다”고 평가했다.

KAIST의 이 같은 실험은 여러 도전에도 직면했다. 일부 학생들은 “새로운 전공필수 과목이 점수를 따기 힘들고 실험 시간이 너무 많아 부담을 준다”는 불만을 내놓고 있다. 또 한편에선 “학교 측이 학생의 진로와 미래에 영향을 주는 중요한 문제를 소통 없이 일방적으로 추진한다”며 절차적 정당성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고려대는 미래 사회에 도전하는 인재를 육성하겠다며 ‘미래대학(크림슨 칼리지)’을 추진했지만 학생과 교수들의 반발로 무산되기도 했다. KAIST도 숨 고르기를 하는 분위기다. 당장 학부를 신설하기보다는 융합커리큘럼을 시범적으로 도입하면서 시간을 두고 지원자에 한해 학부를 운영하겠다는 방침이다.

전문가들은 대학 교육 개편이 불가피하다고 입을 모은다. 권오경 한국공학한림원장(한양대 석학교수)은 “전 세계 어디서든 일할 수 있는 엔지니어를 배출하려면 기본 지식과 전공지식, 실험실습을 바탕으로 문제 해결 능력을 갖추도록 현재 공대 교육을 개편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종득 교수는 “최근 옥시 사태와 탈원전 문제에서 보듯 공학은 다양한 문제를 마주하게 됐다”며 “공학의 지속 가능성을 유지하려면 기술의 사회 경제적 영향을 가르치는 교육 혁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근태 기자 kunt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