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년 전통 독일 파버카스텔 9대 상속인 카를레스 파버카스텔
1883년 빈센트 반 고흐는 친구인 네덜란드 화가 안톤 반 라파르트에게 편지를 썼다. “내가 쓰는 이 연필은 딱 알맞은 굵기에 부드럽고 질이 좋아. 부드러운 나무를 사용하고 겉엔 짙은 녹색으로 칠했는데 하나에 20센트야.” 여기서 묘사된 녹색 연필이 독일의 파버카스텔 제품이다. 지금도 팔리고 있는 스테디셀러다.

파버카스텔은 1761년 설립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필기구 회사’다. 여전히 창업주 가족이 경영하고 있는 대표적인 가족경영 회사다. 각 분야의 세계시장을 지배하는 우량기업을 일컫는 ‘히든 챔피언’으로도 꼽힌다. 필기구 분야의 기술집약형 경쟁력으로 매년 1조원 이상의 매출을 거두며 14개국에 생산공장, 23개국에 해외지사를 운영하고 있다. 신제품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한 9대 상속자인 카를레스 그라폰 파버카스텔 백작(사진)을 23일 만났다.

그는 “최고급 브랜드 ‘그라폰 파버카스텔’을 선보인 이후 매년 ‘올해의 펜’을 출시한다”며 “필기구뿐 아니라 가죽가방, 필통 등 다양한 신제품을 소개하기 위해 한국에서 VIP 대상 행사를 열었다”고 밝혔다. 그라폰 파버카스텔의 문구 제품은 수십만원부터 수천만원까지 꽤 고가다. 몇 년 전엔 창립 250주년을 기념해 다이아몬드가 박힌 9000만원짜리 만년필 10개를 선보였는데 금세 다 팔렸다.

파버카스텔 백작은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MBA(경영학석사)를 마친 뒤 미국 금융가와 독일 유통업계에서 근무했다. 다양한 경험을 쌓은 뒤 4년 전 파버카스텔에 합류해 철저한 후계자 교육을 받았다. 스스로를 ‘회사의 연결 고리’라고 생각한다. 그는 “리더는 바뀌어도 기업의 철학은 변함없다는 게 가족경영의 자부심이자 장점”이라며 “전통과 품질은 꾸준히 유지하되 크고 작은 혁신을 추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가업승계 및 한우물 경영의 성공사례로 꼽히는 파버카스텔은 세대교체를 앞두고 있는 한국 중견기업들에도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파버카스텔 백작은 “과도한 사업 확장은 기업의 존속을 위협하는 일이기 때문에 엉뚱한 분야로 한눈팔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며 “오래가는 회사가 되려면 직원들의 복지와 사회적 책임에 아낌없이 투자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파버카스텔은 30여 년 전 브라질 남동부 사막에 소나무숲을 조성해 연필 제조에 필요한 목재를 충당하고, 1884년 세계 최초로 임직원 자녀를 위한 유치원을 설립하기도 했다.

파버카스텔이 추구하는 가치는 ‘삶의 동반자’다. 연간 20억 개를 생산하는 파버카스텔 색연필로 필기구를 처음 접한 아이들이 자라면서 연필과 펜, 만년필과 노트 등 다른 문구류로 확장하도록 유도한다. 제품을 어린이용, 전문가용, 고급 필기구, 사무용품 등 네 가지로 세분화했으며 종류만 3000여 개가 넘는다. 파버카스텔 백작은 “모든 게 디지털로 바뀌고 있지만 오히려 이런 디지털 시대가 우리에게는 기회라고 생각한다”며 “세상이 바뀌어도 변함없는 가치를 유지하며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잇는 가교 역할에 충실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소비자들은 안목이 높고 가치를 따지는 소비를 해 독일 본사에서도 잠재력이 큰 시장으로 평가하고 있다”며 “좋은 필기구 및 문구로 보답하겠다”고 밝혔다.

김정은 기자 likesmil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