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고리 원자력발전소 5·6호기 건설이 재개되면서 정부의 탈(脫)원전 정책 방향이 노후 원전 조기 폐쇄 쪽으로 기울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2일 “에너지 수급의 안정성이 확인되는 대로 월성 1호기 가동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했고, 앞서 지난 7월에는 “2030년까지 (월성 1호기 외에 원전을) 몇 개 더 폐쇄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노후 원전이 조기 폐쇄되면 사용후핵연료 등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을 영구 저장하기 위한 시설을 조속히 지어야 한다. 원전 가동을 멈췄는데 방폐물을 원전 부지 내에 계속 두면 지역주민들의 반발을 살 우려가 있어서다. 하지만 고준위 방폐장을 짓기 위한 근거법은 1년 가까이 국회에서 논의조차 안 되고 있다. 정부는 2년 전 활동을 끝내고 결과물까지 도출한 ‘사용후핵연료 공론화위원회’를 다시 운영하기로 했다.
노후 원전 조기 폐쇄한다면서… 사용후핵연료 처리는 '허송세월'
◆낮잠 자는 방폐장법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해 11월 ‘고준위 방폐물 관리시설 부지 선정 절차 및 유치 지역 지원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 법안은 2013년 10월부터 2015년 6월까지 20개월간 운영된 사용후핵연료 공론화위원회의 권고안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법안이 국회를 통과해야 고준위 방폐장을 지을 수 있지만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는 이 법안을 제대로 논의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산업부는 이 법안이 통과되면 2028년까지 고준위 방폐장 부지를 지방자치단체 공모를 통해 선정하고, 2053년께 본격 가동할 계획이다. 산업부는 지난해 5월 고준위 방폐장 건설 로드맵을 발표하며 “법안 통과가 지연될수록 방폐장 건설도 오래 걸린다”고 설명했다.

고준위 방폐장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사용후핵연료를 원전 부지 내에 계속 보관해야 한다. 2019년 월성 원전을 시작으로 한빛·고리(2024년) 한울(2037년) 신월성(2038년) 등의 부지 내 저장시설이 잇따라 포화상태가 될 것으로 산업부는 예상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주축이 된 ‘탈핵·에너지전환 의원 모임’은 지난 정부에서 “탈원전 선언을 먼저 하지 않으면 고준위 방폐장법 통과에 협조하지 않겠다”고 주장했다. ‘최순실 사태’가 터지며 탄핵 정국에 접어들고 올해 5월 조기 대선이 치러지면서 고준위 방폐장법은 ‘잊혀진 법안’이 됐다.

◆공론화위 다시 운영

문 대통령이 노후 원전 조기 폐쇄를 사실상 공식화한 만큼 정부와 민주당은 사용후핵연료 처리장 건설을 서둘러야 하는 상황이다. 이와 관련, 정부는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처럼 방폐장 건설 역시 공론화위 단계부터 다시 시작하는 방안을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산업부 관계자는 “탈원전으로 인한 사용후핵연료 발생량과 비용 등을 다시 계산해야 한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하지만 고준위 방폐장법은 “방폐장 부지를 정부가 일방적으로 정하지 않고 지방자치단체를 대상으로 공모하겠다”는 게 핵심이다. 사용후핵연료 발생량 변화와 법안 내용은 상관관계가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그럼에도 정부와 여당이 공론화위를 다시 운영하겠다는 데에는 환경단체들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박근혜 정부 때 운영된 1차 공론화위는 15명의 위원으로 구성됐는데 이 중 3명이 환경단체 출신이었다. 이들은 정부의 탈원전 선언이 전제되지 않았다며 공론화위 해체를 요구했다. 이에 따라 공론화위 활동 마지막날인 2015년 6월30일에는 위원 중 3분의 1이 빠져나가고 9명만 남아 권고안을 발표했다.

산업부는 연내에 2차 사용후핵연료 공론화에 들어가 내년에 새로운 고준위 방폐장 건설 로드맵을 발표할 계획이다. 원전업계 관계자는 “70억원의 예산을 들여 공론화위를 운영했는데 정권이 바뀌었다고 이를 처음부터 다시 하자는 것은 낭비”라며 “법안에 문제가 있다면 국회에서 이를 고치는 게 맞다”고 했다.

이태훈 기자 bej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