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한 금융공기업에 다니다 본사 이전 탓에 부산에 둥지를 새로 튼 이모씨는 말 못할 고민이 하나 생겼다. 세 살이 다 돼가는 딸이 아직도 ‘아빠’란 말을 하지 못하면서다. 아빠 얼굴을 볼 기회가 거의 없어 그럴 만도 했다. KTX를 타고 주말마다 서울과 부산을 오가지만 딸이 아빠를 살갑게 느끼는 건 그때뿐이다. 그는 “안정적이고 연봉도 높은 공기업에 다닌다는 점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만, 본인 의지와 관계없이 지방에 홀로 떨어져 ‘기러기 생활’을 한다는 게 큰 부담”이라고 토로했다.

2008년부터 시작된 공기업 지방 이전 행렬이 올해 햇수로 10년째에 접어들었다. 본의 아니게 지방에서 근무하는 공기업 직원이 늘면서 남모를 설움도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지방에 본사를 둔 일반 기업 직원들도 사정은 비슷하다. 홀로 ‘기러기’ 생활을 하는 김과장 이대리들의 사연을 들어봤다.
공기업 지방 이전 10년… '기러기 직장인'의 설움
아빠는 왜 ‘현대’ 안 다녀?

울산의 한 공공기관에 다니는 김 과장은 ‘기러기는 절대 안 된다’는 소신으로 아내와 자녀를 설득해 2년 전 울산으로 집을 옮겼다. 하지만 소신은 현실 앞에서 무너졌다. 가족들이 연고가 없는 지역에서 적응하지 못한 채 큰 어려움을 겪으면서다. 결국 김 과장은 최근 가족들을 원래 살던 경기 부천으로 돌려보냈다.

“아이들이 어느 날 아빠는 왜 현대에 다니지 않느냐고 묻더라고요. 울산은 현대자동차나 현대중공업 등 큰 기업과 연관된 사람들이 똘똘 뭉쳐 지내는 곳이라 가족들이 새로 적응하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기러기 생활을 자처하기로 했죠.”

여러 이유로 기러기 생활을 하는 직장인의 애로사항 중 하나는 상사와 한곳에서 살아야 하는 불편함이다. 최근 경남 진주 본사로 자리를 옮긴 이 과장은 상사와 한 사원아파트에 살면서 언젠가부터 자신이 ‘하인’으로 전락했다는 느낌까지 받고 있다. 그는 “회사에서 하루종일 얼굴을 맞대는 것도 불편한데 아침밥까지 같이 차려 먹고 함께 출근하려니 영 피곤한 게 아니다”고 토로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스스로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경우도 있다. 전북 전주로 본사를 옮긴 공기업에서 5년간 자금 운용역으로 근무한 박모씨는 최근 한 자산운용사로 자리를 옮겼다.

회사를 따라 전주로 자리를 옮긴 뒤 적응하지 못해서다. 서울과 왕복 다섯 시간이 걸리는 탓에 해외 주요 투자자를 마음껏 만나 일하기가 어려웠다. 네 살배기 딸을 매일 볼 수 없는 ‘강제 기러기’가 돼야 한다는 점도 불만이었다. 그는 “같은 이유로 퇴사를 고민하고 있는 직원이 꽤 있는 것으로 안다”고 귀띔했다.

부산에서 살지만 ‘부산댁’은 NO

지방에서 일하는 ‘화려한 싱글’도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서울의 한 금융공기업에서 근무하다 본사 이전에 따라 부산에 내려와 살고 있는 김 대리의 가장 큰 고민은 결혼이다. 서울에서 만난 남자친구와는 장거리 연애 끝에 헤어졌다. 이후 부산 출신 남자친구와 2년간 연애했지만 결국 결혼 문턱에서 이별했다. ‘부산댁’이 될 용기가 없어서다.

“막상 부산댁이 될 생각을 하니 숨이 턱 막히더라고요. 그렇다고 직장이 서울에 있는 사람을 쉽게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여러 가지로 난감하기만 합니다.”

전남 나주로 본사를 옮긴 공기업에 근무하는 김모씨는 요즘 틈틈이 법학전문대학원 시험 준비를 하고 있다. 법조인이 되는 게 오랜 꿈이기도 했지만, 더 큰 이유는 서울로 터전을 옮기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서울 토박이로 살다가 돌연 나주로 옮긴 뒤 우울증까지 생겨 견딜 수가 없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대학생 때부터 이어오던 밴드 생활을 할 수 없게 된 게 가장 큰 불만이었다. “무인도에 혼자 떨어져 있다는 느낌이 들어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어요.” 김씨의 말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마음고생을 겪는 이들과 달리 지방 근무를 통해 다른 즐거움을 찾는 김과장 이대리들도 있다. 대구로 이전한 한 공기업의 정 과장이 그런 경우다. 퇴근 후면 사내 농구 동아리 회원들과 인근 대학 농구장으로 향해 실컷 땀을 흘린다. 집에 돌아와서는 TV 야구 중계를 시청하는 게 하루 일과다. 서울에서 맞벌이 중인 아내와 함께 네 살짜리 아들을 키울 땐 상상도 못한 일이다.

“지방에 내려오고 나서 오히려 ‘나만의 삶’을 다시 찾은 듯한 기분이 들어요. 주말엔 더 애틋한 마음으로 가족들과 만날 수 있고요. 육아와 집안일도 열심히 돕고 있습니다.”

기러기 생활로 오히려 더 사이가 좋아졌다는 부부도 있다. 박모씨는 지난해 근무하던 회사가 강원 원주로 옮기면서 가족을 서울에 두고 혼자 이사했다. 출퇴근 문제에 아이들 교육까지 고려해 주말부부를 선택한 것이다. 처음에는 가족과 떨어져 생활하는 것에 대한 걱정이 많았지만, 지금은 오히려 만족해하고 있다.

“서울에 있을 때는 아내와 싸움도 많이 하고 육아 때문에 갈등도 많았는데, 떨어져 지내면서 오히려 다툼이 줄었어요. 3대가 공을 쌓아야 주말부부가 된다는 말도 있는데 최대한 즐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윤희은 기자 sou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