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간판에 검정 글씨로 ‘MASSIVE BLADE’라고 쓰여 있을 뿐 아무런 설명도 없는 서울 공릉동의 한 1층 사무실. 겉으로 봐선 누구나 그냥 지나칠 특색 없는 사무실이지만 세계 프로 아이스하키 선수들 사이에서 ‘매시브 블레이드’란 이름은 유명하다. 사무실은 체코 라트비아 프랑스 핀란드 일본 등 세계 곳곳에서 온 주문서가 벽 곳곳에 붙어 있어 글로벌 기업임을 짐작하게 했다. 다른 쪽 벽엔 프랑스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 선수 다미엔 플루리가 선물한 선수복 상의가 액자에 걸려 장식돼 있었다.
허문찬 기자 sweat@hankyung.com
허문찬 기자 sweat@hankyung.com
이곳은 세계에 네 개뿐인 아이스하키 스케이트 날 제작업체 가운데 하나인 매시브테크 사무실이다. 매시브 블레이드라는 브랜드로 아이스하키, 쇼트트랙, 스피드스케이팅, 장애인 아이스하키(슬레지) 등의 스케이트 날을 제작한다. 내년 2월과 3월에 각각 열리는 2018 평창동계올림픽과 동계패럴림픽에서도 많은 국가대표팀 선수가 매시브 블레이드 스케이트 날을 달고 경기를 펼치게 된다. 1980년생으로 올해 서른일곱 살에 불과한데도 ‘스케이트 날 장인’으로 불리는 양경선 매시브테크 대표는 “좋아하는 일을 하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다”며 “세계 1위가 되겠다는 목표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아이스하키 선수들이 내가 만든 스케이트 날을 신고 만족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했다.

우연히 접한 아이스하키에 흠뻑 빠져

"평창 휩쓸 '블레이드 러너' 제 손 끝에 달려있죠"
서울과학기술대 기계설계공학부를 졸업한 양 대표가 스케이트 날 만드는 일을 하게 된 건 아이스하키가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처음 접한 건 고교를 졸업하고 나서였다. “(경기 성남시) 분당중앙공원에서 친구들이랑 인라인 타면서 스틱 들고 놀고 있었어요. 그때 지나가던 아저씨 한 분이 ‘너희 뭘 알고 하냐? 내가 가르쳐 줄까’라고 했죠. 지금 SBS에서 아이스하키 경기를 해설하는 오솔길 해설위원이었어요.” 오 해설위원은 아이스하키 국가대표, 석탑건설 아이스하키팀 주장 등을 지낸 인물이다.

양 대표는 오 위원의 지도를 받아 아마추어 클럽팀에서 뛰면서 아이스하키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다고 했다. “제가 알기로는 구기 종목 중에서 아이스하키가 공수 전환이 제일 빨라요. 긴박감이 넘치죠. 선수들 간 몸싸움도 어느 정도 허용돼 몸으로 부딪치는 스포츠예요. 스트레스가 굉장히 많이 해소됩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아이스하키를 한 번도 안 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해본 사람은 없다고 해요.”

어학연수차 캐나다 삼촌 집에 잠깐 머물 때도 동네 할아버지들과 아이스하키만 치다 왔다고 한다. 캐나다 청년들과는 수준이 안 맞았던 것. 그는 “할아버지들이 하나하나 친절히 가르쳐 준 덕분에 많이 배웠다”고 했다.

1년 정도 한양대 아이스하키부에서 연습생으로 뛰기도 했다. 당시 한양대 아이스하키부에 골키퍼(골리)가 한 명밖에 없어 클럽팀에서 골리 역할을 맡곤 하던 양 대표가 소개를 받아 긴급 투입된 것이었다. 그는 “한양대 학생이 아니다 보니 정식 경기에는 출전할 수 없었다”며 “이 때문에 한때 편입도 생각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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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프로 아이스하키 선수 40%가 사용

매시브테크 사무실에는 책이 빽빽하게 꽂힌 책장이 여럿 있다. 임정민 구글캠퍼스서울 총괄이 쓴 《창업가의 일》 같은 책도 있지만 상당수는 기계설계와 관련한 전문서적이다. 그는 대학 졸업 후 LCD(액정표시장치)와 LED(발광다이오드) 등의 디스플레이를 생산하는 장비제조업체에 다니다 서울과기대 부설 연구소로 옮겨 전자현미경을 개발하는 연구를 했다.

2012년 11월 매시브테크를 창업했다. 처음엔 스케이트 날 만드는 회사가 아니었다. 한국원자력의학원 입자가속기에 들어가는 부품이나 대웅제약의 욕창 치료기기에 들어가는 부품 등을 제조해 납품했다. 일종의 외주 용역 사업이다. 스케이트 날을 제작해 본 것은 2013년 말이었다. “아이스하키를 하다 제 스케이트 날이 부러졌어요. 재미삼아 스케이트 날을 직접 만들어봤습니다. 그러다 친구 것도 하나 만들어 주고, 프로 선수(마이크 테스트위드·강원 하이원) 것도 하나 만들어 줬는데 반응이 좋더라고요. 부품 외주 용역만 하다 보니 수주가 항상 불안정했었는데, 이참에 자체 브랜드로 사업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가 보기에 스케이트 날 시장 규모는 대기업이나 중견기업이 노리기엔 작았다. 그렇다고 아무나 진입할 수 있는 시장도 아니었다. 아이스하키 날의 경우 캐나다에 두 개, 핀란드에 한 개 회사가 있다. 그는 “세계적으로 아이스하키 시장 규모는 약 4000억원, 쇼트트랙과 스피드스케이팅은 각각 700억~800억원 정도 된다”고 했다. 그는 회사와 연구소에서 일한 덕분에 기계 설계와 금속 코팅, 열처리 등에 익숙했다. 아이스하키 선수 친구들도 있었다.

선수들이 워낙 장비에 예민하다 보니 새로운 날을 권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가 홍보차 안양 한라 아이스하키팀 장비매니저를 찾아갔을 때 우연찮게 기회가 찾아왔다. “안양 한라팀이 4~5일 뒤 일본 원정을 가는데, 스케이트 날을 가는 연마기가 고장났다는 거예요. 그걸 제가 고쳐줬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날도 만드는데, 선수들이 이걸 써볼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죠.” 그때 흔쾌히 한번 써보겠다고 한 선수가 지난해 한국으로 귀화한 캐나다 출신 맷 달튼이다. 그는 지금도 매시브 블레이드 날을 애용하고 있다. 이후 한국 국가대표인 박성제 선수(강원 하이원) 등 국내 프로 아이스하키 선수의 약 40%가 매시브 블레이드 제품을 쓰고 있다.

맞춤형 제작으로 프리미엄 제품 이미지 얻어

매시브 블레이드는 스케이트 날 브랜드 중에서 프리미엄 브랜드로 통한다. 모든 날이 맞춤형이다. 선수들의 발 모양과 경기 성향에 따라 날 길이와 모양이 조금씩 다르다. 국내 선수는 그가 직접 찾아가 치수를 재고 원하는 스타일에 대해 이야기를 듣는다. 외국 선수들에겐 설계 디자인을 보내준다. 그것을 프린트해 실물 사이즈와 비교해보고 고칠 점을 알려주면 다시 수정하는 식이다. 이렇게 맞춤형 날을 제작해주는 곳은 매시브테크가 유일하다.

스케이트 날은 스테인리스스틸로 제작한다. 원재료인 스테인리스스틸 판재를 처음엔 중국과 스웨덴 것을 쓰다 2014년 6월께 포스코 제품으로 바꾼 것도 품질을 높이는 데 효과를 냈다. “중국이나 스웨덴산 스테인리스스틸을 썼을 때는 같은 방법으로 스케이트 날을 제작해도 품질이 계속 달라졌어요. 1월에 구매한 철로 만든 날과 12월에 구매한 철로 만든 날이 서로 달랐던 거죠. 포스코 제품으로 바꾸고 나선 이런 문제가 사라졌습니다.”

매시브 블레이드 날은 현재 캐나다 체코 프랑스 스웨덴 핀란드 노르웨이 영국 일본 라트비아 벨라루스 러시아 등 12개국 프로 아이스하키팀에서 쓰고 있다. 2015년 체코에서 열린 아이스하키 월드챔피언십 등 큰 대회가 열릴 때마다 찾아가 장비매니저와 선수들을 상대로 전방위 홍보를 펼친 덕분이다. 그는 “한 장비매니저는 러시아 사람이었는데 처음엔 잡상인 취급하다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빅토르 안(안현수) 최고’라는 얘기를 2~3분 하면서 태도가 호의적으로 바뀌기도 했다”고 말했다. 지금은 외국 선수들이 자신의 인스타그램 등 소셜미디어에 매시브 블레이드 날을 쓴다고 밝히면서 자연스럽게 홍보가 되고 있다고 한다.

태릉선수촌과 쇼트트랙 스케이트 날도 개발

양 대표는 요즘 태릉선수촌의 한국스포츠개발원과 쇼트트랙 스케이트 날을 시험하고 있다. 쇼트트랙과 스피드스케이팅은 기록 경기라 선수들이 새로운 날을 써보는 것에 더 보수적이다. 이번 평창동계올림픽에선 한국 국가대표 쇼트트랙·스피드스케이팅 선수가 매시브 블레이드 날을 쓰지 않지만 다음 번 세계선수권대회나 동계올림픽에선 도입을 기대해 볼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또 포스코의 지원을 받아 평창동계패럴림픽에 출전하는 장애인 아이스하키 한국 국가대표팀을 위한 썰매도 새로 제작했다. 매시브 블레이드 날은 한국 캐나다 독일 일본 장애인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에서 쓰고 있는데, 한국 대표팀에는 경량 소재를 사용한 썰매 몸체를 따로 개발해 제공했다. 양 대표는 “기존 알루미늄 대신 포스코에서 개발한 마그네슘 합금을 써서 무게를 대폭 줄였다”며 “한국 대표팀이 더 수월하게 썰매를 몰고 경기를 펼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 '패럴림픽의 꽃'장애인 아이스하키

"경량 썰매 개발은 포스코와 상생협력…한국 대표팀의 비밀병기죠"


‘아이스 슬레지 하키’(사진)라 불리는 장애인 아이스하키는 동계패럴림픽의 꽃으로 불린다. 선수들이 하반신을 마음대로 쓸 수 없어 스케이트 대신 썰매를 타고 경기를 펼치지만 아이스하키 종목의 속도감과 역동성은 그대로 살아있기 때문이다.

장애인 아이스하키 한국 대표팀은 지난 4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동메달을 땄고, 내년 3월 평창동계패럴림픽에서도 메달 획득을 노리고 있다. 이를 위한 ‘신무기’가 있는데, 바로 매시브테크와 포스코가 함께 제작한 경량 썰매다. 포스코 기술연구소장 출신으로 ‘철강 소재 전문가’인 권오준 포스코 회장의 지시로 시작된 프로젝트다.

포스코는 지난 5월께 전문가를 수소문하다 ‘스케이트 날 장인’으로 알려진 양경선 매시브테크 대표를 알게 됐고, 같이 경량 썰매 개발에 나섰다. 경량 썰매에는 포스코가 개발한 고망간 방진강, 마그네슘 합금, 특수 열처리 스테인리스스틸 등 최첨단 소재가 모두 동원됐다. 마그네슘은 알루미늄보다 무게는 34% 가볍고, 고망간 방진강은 알루미늄보다 강도가 2.5배 이상 세다. 헬멧 등 안전 장비로 몸이 무거운 선수들이 더 날렵하게 썰매를 끌 수 있으면서도, 상대 선수 썰매와 부딪혔을 때는 충격을 흡수해 더 잘 견딜 수 있다. 기존에는 캐나다산 썰매를 써 수리가 어려운 문제도 있었다.

양 대표는 “마그네슘 등 낯선 소재가 많아 초반엔 썰매 개발에 애를 먹었다”며 “포스코가 소재 지원뿐 아니라 연구소의 여러 연구원을 통해 기술 지원까지 해주면서 개발에 속도를 낼 수 있었다”고 했다.

세계 랭킹 2위까지 올랐던 장애인 아이스하키 한국 대표팀도 한껏 기대를 나타내고 있다. 한민수 한국 대표팀 주장은 “아이스하키 종목은 장비가 경기력의 거의 60% 차지할 정도로 중요하다”며 “견고하면서도 가벼운 썰매가 생긴 만큼 이번 평창대회에서 좋은 결과를 내겠다”고 말했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