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조5600억원. 정부가 연구중심 대학원을 키운다는 명목으로 1999년부터 18년간 들인 돈이다. 프로젝트 이름은 ‘BK21’로 국제적인 학술지에 실리는 논문 수를 늘리자는 취지다. 결과는 어떨까. 논문 건수는 약 8배로 늘었다. 하지만 피인용지수로 본 논문의 수준은 ‘평균 이하’로 평가됐다. 4조원이 넘는 세금을 먹고도 그저 그런 ‘논문 공장’으로 전락한 한국 대학의 민낯이다.

19일 한국경제신문은 스코퍼스(세계 최대 출판사인 엘스비어가 제공하는 색인·인용 데이터베이스)를 기반으로 한국을 포함한 상위 20개국의 논문 성과를 분석했다. 20년(1997~2016년)간의 추적 조사 결과다.
4.5조 쓰고 '논문 공장' 된 한국 대학… 논문 질은 세계 평균 밑돌아
◆“논문 목적은 연구 아니라 연구비”

미국 등 선진국 대학과 한국 대학의 가장 큰 차이는 논문을 위해 연구하느냐, 실제 삶을 바꾸기 위해 연구하느냐다. 국내 대학 풍토에서 논문을 쓴다는 것은 곧 연구비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수의 능력은 연구비를 얼마나 많이 타느냐로 평가된다. 약 20조원에 달하는 국가 연구개발(R&D) 자금 대부분이 ‘논문을 위한 논문’을 양산하는 데 소진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한경과 엘스비어가 공동 분석한 20개국 연구 성과에 따르면 한국은 논문 건수가 1997년 1만3050건에서 지난해 7만6733건으로 꾸준히 성장했지만 2015년 7만7362건을 정점으로 감소세다. 세계 순위 역시 2006년 12위에 오른 이후 정체 상태다. 중국이 미국에 이어 2위다.

논문의 질은 우려할 만한 수준이라는 평가다. 상대적인 피인용지수(FWCI, 1이면 평균)가 1998년 0.8이었다가 2009년 세계 평균인 1에 도달했으나 지난해 다시 1 밑으로 떨어졌다. 세계 랭킹도 1997년 출발선이던 13위로 다시 돌아갔다.

엘스비어 관계자는 “논문의 피인용지수는 아시아 국가에 상대적으로 불리한 면이 있다”면서도 “상위 10% 저널에 발표된 논문의 비중을 기준으로 한국이 일본은 물론 대만에도 뒤처진다는 점은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라고 지적했다.

◆정부 입맛에 맞춘 ‘청부 연구’ 만연

전문가들은 ‘돈은 넘쳐나는데 제대로 쓰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진단한다. 한국연구재단 단장을 지낸 김성완 서울대 의공학과 교수는 “서울의 주요대 이공계 교수들 대부분이 1년에 5억~10억원가량의 연구비를 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융합 연구만 해도 한국연구재단 예산 4조원 중 약 10%가 타 학문과의 협업에 배정돼 있다.

서울 주요대 공대 교수는 “서로 알지도 못하는 교수 둘이서 일단 융합과제를 제출하고 돈이 나오면 정확하게 반으로 나눈다”며 “연구는 각자 따로 하고, 보고서 쓸 때만 얼굴을 보는 식”이라고 말했다.

돈을 대는 정부가 연구 주제를 정하고, 연구자들은 돈을 받기 위해 그 틀에 맞추는 관행도 여전하다. 박근혜 정부 땐 ‘창조경제에 어떤 기여를 할 것인가’가 연구비를 탈 수 있는 핵심 조건이었다면 요즘은 ‘ICBM’의 틀을 벗어나면 지원금을 받기 힘들다. ICBM이란 사물인터넷(IoT), 클라우드컴퓨팅, 빅데이터, 모바일의 앞글자를 딴 말이다. 4차 산업혁명이란 ‘키워드’도 꼭 들어가야 할 요소 중 하나다.

김 교수는 “월드와이드웹(WWW)이라는 인터넷 개념이 처음 나온 것은 DARPA(미국방위고등연구계획국)의 연구 지원에서 시작됐다”며 “그때 DARPA가 던진 질문은 세계에서 싸우고 있는 미국 병사들이 컴퓨터만 열면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고, 각종 창의적인 아이디어 경합 끝에 채택된 게 월드와이드웹 시스템이었다”고 말했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