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IC(application specific integrated circuit·주문자 특화 반도체). 시스템 반도체 중 특정 목적에 맞춰 주문 생산하는 반도체를 지칭하는 말이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반도체 전문가나 종사자들만 쓰던 단어였지만 최근 일반인에게도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다. 비트코인 등 가상화폐 채굴에 특화된 반도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다. 좋은 ASIC칩을 구하면 남들보다 더 많은 가상화폐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에선 이 반도체 시장 장악을 위한 삼성전자와 대만 TSMC 사이의 경쟁도 달아오르고 있다.
가상화폐서 맞붙은 삼성-TSMC 반도체 싸움
◆컴퓨팅 능력의 진화

비트코인을 비롯한 대부분 가상화폐는 컴퓨터를 이용해 어려운 수학 문제를 푸는 방식으로 생성된다. 문제는 갈수록 어려워진다. 단기간에 많은 가상화폐가 발행돼 화폐 가치가 떨어지고 신인도를 훼손하는 일을 막기 위해서다. 가상화폐 가격이 올라가면 투자자들의 채굴 시도가 늘어나고 문제의 난도도 덩달아 올라간다. 이에 따라 채굴을 가능하게 하는 컴퓨팅 능력도 계속 높아져야 한다.

비트코인이 세상에 처음 나온 2009년에는 가정용 PC로도 채굴할 수 있었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복수의 문제풀이를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그래픽처리장치(GPU)가 각광받게 됐다. 하지만 2013년 비트코인 가격이 단위당 1000달러를 돌파하자 채굴에 특화된 ASIC가 GPU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ASIC는 비트코인은 물론 대시코인, 라이트코인 등 각각의 가상화폐 알고리즘 풀이에 최적화된 반도체칩이다. 채굴업체들은 여기에 컨트롤러 등 각종 추가 장치를 붙여 채굴기를 만든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ASIC를 활용한 최신 제품은 GPU 대비 수만 배 빠른 속도로 가상화폐를 채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러다 보니 대량 채굴에 따른 가상화폐 신뢰성 하락을 우려해 이더리움 등 일부 가상화폐는 ASIC칩을 이용한 채굴을 차단하는 프로그램도 가동하고 있다.

◆반도체 공정의 진화

중국 비트메인 등 전문 채굴업체들이 설계한 뒤 삼성전자 TSMC 등 파운드리반도체 회사에 맡겨 생산하는 ASIC칩은 300㎜ 웨이퍼 한 장을 기준으로 원가만 2억~3억원에 이른다. 웨이퍼 한 장에서 얻어진 수천 개의 ASIC칩 중 하나가 장착되는 ASIC 채굴기 가격은 최신형을 기준으로 700만~1000만원 안팎이다. 전문 채굴업자들은 이 같은 채굴기를 수백 대씩 돌리며 비트코인을 파낸다.

지난달 4672달러까지 치솟았다가 중국 정부의 규제 소문에 이달 초 급락한 비트코인 가격은 최근 3800달러대를 회복했다. 가상화폐 투자 열기가 좀처럼 식지 않으면서 ASIC 채굴기 제조업체 사이의 경쟁도 뜨겁다. ASIC칩이 첨단화될수록 채굴기의 가동 효율은 높아지고 소비전력은 낮아지기 때문이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20나노미터(㎚·1㎚=10억 분의 1m) 공정으로 제작된 ASIC칩 정도면 시장에서 충분히 경쟁력을 가졌다. 하지만 올 들어 미세화 수준이 10㎚대로 떨어지더니, 미국 에이치마이너스가 지난달 10㎚ 공정을 적용한 비트코인 채굴용 ASIC칩을 내놨다. 일본 팹리스(반도체 설계업체) GMO는 한발 더 나아가 최근 7㎚ ASIC칩을 상용화하겠다고 발표했다. 10㎚는 파운드리가 생산할 수 있는 가장 미세화된 칩으로, 이를 만드는 곳은 삼성전자밖에 없다. 7㎚ 공정은 삼성전자와 TSMC가 내년부터 가동에 들어간다. 비트코인 채굴용 ASIC에 최첨단 파운드리 기술이 적용되고 있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가상화폐 관련 ASIC칩은 채산성이 높아 팹리스들이 웨이퍼 한 장당 수억원의 가공 비용을 부담하며 미세화 공정을 주도하고 있다”며 “파운드리 회사들도 첨단공정 기술을 조기에 안정시킬 수 있는 장점 때문에 적극 수주에 나서고 있다”고 말했다.

노경목 기자 autonom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