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1일 서울에 있는 한 채권추심업체 사무실. 국민행복기금 추심을 전담하는 직원들의 책상 35개 중 14곳엔 주인이 없었다. 이 회사 관계자는 “문재인 대통령이 빚탕감 공약을 내놓은 뒤에 빚 상환을 거부하는 채무자들이 늘고 있다”며 “추심 실적에 따라 급여가 달라지는 채무관리사들이 생계를 위해 회사를 떠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채무관리사가 추심을 위해 7명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통화가 연결되지 않았다. 채무관리사는 “하루에 추심 통화 두세 통 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라며 “어렵게 통화가 돼도 자기 빚은 없어진 거 아니냐고 으름장을 놓곤 한다”고 토로했다.
채권추심업체 직원 전화하자 "빚 탕감 해준다는데 왜 연락했나"
◆무용지물 된 채무재조정 약정

40분가량 시도한 끝에 다시 한 채무자와 연락이 닿았다. 연체 이유를 묻자 채무자는 “빚진 지 벌써 10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빚을 갚아야 하냐”며 “정부에서 10년 넘으면 안 갚아도 된다고 했는데 왜 전화하느냐”고 끊었다. 채무관리사는 “연락이 잘 됐던 채무자들도 연락이 두절되거나 채무 상환을 거부하는 사례가 부지기수”라며 “연락이 끊어지면 사실상 추심 방법이 없어 난감하다”고 말했다.

국민행복기금은 장기연체자들의 신용 회복을 위해 마련됐다. 은행들이 출자한 6970억원을 재원으로 10조6000억원의 연체 채권을 매입해 채무 재조정, 전환대출(바꿔드림론)을 하고 있다.

국민행복기금은 문재인 정부의 빚 탕감 정책의 핵심이다. 금융위원회는 지난달 국민행복기금이 보유한 1000만원 이하, 10년 이상 장기연체채권을 상환능력심사를 거쳐 탕감해주기로 방침을 정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후보시절 제시한 공약을 정책으로 내놓은 것이다. 빚 탕감 대상자는 약 40만3000명, 소각 대상 채권은 5조6000억원으로 추정됐다.

문제는 상환능력에 대한 기준이 정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국민행복기금 관계자는 “어떤 기준으로 빚을 탕감할지 당국에서 정해주지 않은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채권추심업체 관계자는 “정부가 민간, 금융공기업, 국민행복기금을 모두 언급하면서 10년이 지난 모든 채권을 소각해주는 것처럼 홍보해서 생긴 문제”라며 “차라리 어떤 기준으로 채권을 분리할지에 대해 명확한 기준을 빨리 세워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지난달 기자간담회에서 “(빚 탕감과 관련해) 많은 분들이 도덕적 해이를 우려하는 걸 잘 알고 있지만 상환 능력을 엄정히 평가해 추진하겠다”면서도 “누가 상환능력이 없는지를 젓가락으로 생선 살 발라내듯 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라고 밝혔다.

◆역차별 받는 성실 상환자들

정부는 연체자를 위한 금융지원 정책을 연달아 내놓을 계획이다. 국민행복기금에 이어 금융공기업 소멸시효 완성채권(16조1000억원)은 물론 민간부문 연체채권 4조원도 소각한다는 계획이다.

금융계에선 빚 탕감 정책이 성실히 채무를 상환하는 사람과 연체자 사이에 형평성 문제를 일으킬 것이란 지적을 내놓고 있다. 성실하게 빚을 갚아온 사람을 역차별하는 정책이라는 주장이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빚 탕감 정책을 내놓으려면 형평성을 고려해야 한다”며 “사전에 약정에 따라 열심히 빚을 갚은 사람은 뭐냐는 원초적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국민행복기금을 통해 약정을 맺고 감면받은 빚을 갚은 채무자는 이미 83만 명에 이른다.

조 교수는 “빚을 줄여주는 것과 100% 빚을 탕감해주는 것은 다른 문제”라며 “특히 4조원에 달하는 민간부문의 채권을 정부 마음대로 소각하겠다는 것은 국가주의적 발상”이라고 지적했다.

금융업계 관계자들은 “채무자들이 빚에 대한 성실한 상환 의무를 저버리면 금융 시스템 자체는 붕괴될 수 밖에 없다”며 “금융당국이 채무 탕감 계획을 마련할 때 이를 반드시 염두에 둬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김순신 기자 soonsin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