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켓인사이트 8월20일 오후 3시41분

현대상선이 세계 최대 자산운용회사인 블랙록으로부터 최대 1조원 규모의 투자 유치를 추진하고 있다. 자금 운용에 숨통을 틔워 장기화되고 있는 해운업 불황에서 살아남기 위한 승부수다.

20일 투자은행(IB)과 해운업계에 따르면 현대상선은 블랙록과 6000억~1조원 규모의 투자 유치 협상을 하고 있다. 블랙록이 현대상선 유상증자에 참여하는 방식이다. 앞서 현대상선은 해외 사모펀드(PEF) 운용사와 자산운용사 등 재무적 투자자(FI)를 대상으로 제한적 입찰을 받아 블랙록을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했다.
[마켓인사이트] 현대상선, 최대 1조 블랙록서 유치 추진
거래가 성사되면 지난 6월 말 기준 7015억원인 현대상선 자기자본이 2조원 이상으로 불어난다. 블랙록은 산업은행에 이어 2대 주주가 된다. 산업은행도 증자에 참여해 최대주주 지위를 유지하는 구조다. AT커니는 현대상선이 장기적으로 생존하기 위해선 2022년까지 10조원 이상이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현대상선은 지난해 9월부터 자체적으로 자본 확충을 추진해 왔다. 산업은행에서 추가 자금을 받기 위한 사전정지 작업이라는 게 업계 분석이다.

정부는 지난해 한진해운 파산 이후 하나밖에 남지 않은 국적 원양선사인 현대상선을 살리기 위해 1조5000억원가량을 투입했다. 하지만 호흡기를 달았을 뿐 정상화까지는 갈 길이 멀다는 지적이다. 해운경기 불황이 장기화하는 가운데 인수합병(M&A)을 통한 초대형화로 경쟁력을 강화하는 해외 경쟁사들 사이에서 여전히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마켓인사이트] 현대상선, 최대 1조 블랙록서 유치 추진
글로벌 컨설팅 회사 AT커니는 세계 14위인 현대상선이 글로벌 선사가 되려면 컨테이너선 발주 5조6000억원, 컨테이너 구입 3조3000억원, 국내 터미널 지분 인수 및 고비용 용선 정리 1조원 등 10조원 이상이 필요하다는 진단 결과를 내놨다. 이런 상황에서 블랙록의 투자는 대규모 자금을 마련하는 데 ‘마중물’ 역할을 할 것이라는 게 회사 측 기대다.

현대상선 관계자는 “블랙록의 투자가 성사될 경우 자기자본을 2조5000억원만 더 확충하면 나머지 필요한 돈은 선박금융을 통해 조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마켓인사이트] 현대상선, 최대 1조 블랙록서 유치 추진
블랙록도 신중하게 투자를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상선이 현대그룹과 분리하는 작업은 마쳤지만 9분기 연속 적자를 거듭하면서 생존 여부가 여전히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현대상선은 지난 2분기에도 매출 1조2419억원에 1281억원의 영업손실을 냈다.

투자 유치의 핵심 변수는 이사 한 명 파견 외에 현대상선이 부산과 인천항 등에 보유한 항만터미널 지분을 담보로 요구하는 블랙록의 투자 조건이다. 산업은행은 “대출이 아닌 지분 투자에 담보를 제공하는 건 원칙에 어긋난다”며 반대하고 있다. 협상은 난항에 빠진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선 현대상선이 보유한 터미널 지분 가치를 모두 합쳐도 2000억원을 밑돌기 때문에 무리한 투자 조건이 아니라는 시각도 있다. 2015년 현대라이프 증자에 참여해 2대 주주가 된 대만 푸방그룹이나 올해 현대삼호중공업에 4000억원을 투자한 IMM PE가 기존 주주로부터 풋옵션(일정 가격에 주식을 되사주는 옵션)을 보장받은 것은 담보와 별다를 게 없다는 이유에서다.

한 IB업계 관계자는 “국내 PEF들이 지분 투자를 하면서 연 8%의 수익을 보장받는 관례에 비춰볼 때 블랙록이 투자자를 안심시킬 장치로 담보를 요구한 건 무리수가 아니다”고 말했다.

해운업계 관계자는 “블랙록의 투자가 무산되고 해운경기가 되살아나지 않아 현대상선이 또다시 자금난에 빠지면 정부와 산업은행은 추가로 수조원의 혈세를 쏟아부어야 하는 상황을 맞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정영효 기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