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거일 칼럼] 역사에서 옳은 교훈을 얻기는 힘들다
사회의 개선을 어렵게 하는 근본적 조건들 가운데 하나는 대규모 대조 실험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어떤 제도나 정책의 효과를 명확히 측정하기 어렵다. 같은 조건에서 출발한 남북한이 보인 차이들이나 명령경제에서 시장경제로 전환한 중국의 변모처럼 대조 실험에 가까운 사례가 더러 나오지만 사회적 실험들에 대한 평가는 편차가 심하다.

특히 종교나 경제 체제와 같은 기본적 기구들에 대한 평가는 늘 모호하고 논란을 부른다. 지지자들은 더욱 강력히 시행해야 효과가 제대로 난다고 주장하고, 반대자들은 효과가 좋지 않으니 당장 철폐해야 한다고 맞선다. 어느 쪽이 옳은지 판별하기 어려우니 지속적 개혁이 어렵고 사회적 분열은 깊어진다.

근대 이후 가장 거센 논쟁은 기독교를 둘러싸고 나왔다. 서양 사회가 점점 어려운 문제들을 맞자 기독교 신자들은 기독교의 영향이 줄어들면서 사회 문제가 커졌다고 진단했다. 반(反)기독교적 지식인들은 2000년 넘게 이어진 실험에서 기독교가 실패했음이 드러났는데도 그것을 강화하려는 것은 비합리적이라고 맞섰다. 근년엔 이슬람 문명권에서 비슷한 상황이 나왔다. 이슬람교의 영향을 줄이려는 세속주의자들과 신정체제를 펴려는 근본주의자들 사이의 다툼이 거세졌다.

우리에게 큰 뜻을 지닌 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평가다. 루트비히 폰 미제스는 역사적으로 자본주의가 제대로 시행된 적이 없다고 지적했다. 갖가지 제약이 가해져 자본주의라 불린 체제도 실제로는 반자본주의적 요소를 많이 지녔고, 자본주의의 결점이라 꼽힌 것도 대부분이 자본주의의 원칙을 제대로 실행하지 않은 데서 나왔다고 진단했다. 그의 처방은 간단명료했다. ‘자본주의의 원리를 더 충실하게 따르면 더 효율적이고 정의로운 사회가 나온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본주의가 큰 결점들을 안은 체제라 여긴다. 자연히 자본주의를 억제하거나 대치하려는 충동이 늘 거세다. 한국 사회는 특히 반자본주의적이었다. 노예제에 바탕을 둔 엄격한 신분제 사회를 유지했으므로, 자유로운 경제 활동이 나올 수 없었다. 교역이 가치를 창출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지식인을 개항 이전까지 단 한 사람도 배출하지 못했고, 줄곧 상업을 천시하고 억압했다. 그래서 1000년 넘게 압제적이고 가난한 사회에 머물렀다.

사유재산을 바탕으로 삼은 자본주의의 핵심은 재산권이다. 법의 지배와 경제적 자유도 재산권으로 구현된다. 역사적으로 재산권은 크게 제약됐지만, 어쩌다 그것이 제대로 확립되면 풍요롭고 너그러운 사회가 출현했다. 고대의 바빌론은 전형적이니, 자본주의 질서에 충실한 함무라비 법전이 그 사실을 증언한다. 지식이 원시적 수준에 머물고 사회 기구가 부족적 관행을 반영했던 고대에서 합리적 재산권이 확립됐다는 것은 경이적이다. 그 뒤로 상인이 세력을 얻은 도시에선 재산권이 확립됐고 교역을 통해 번창했다. 베네치아, 암스테르담, 런던은 잘 알려진 예다.

70여 년에 걸친 공산주의 실험은 자본주의의 우수성을 의심의 여지 없이 증명했다. 불행하게도 그 실험의 결과조차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많다. 자본주의의 원리를 충실히 따라서 발전을 이룬 한국 사회에서도 노무현 정권은 드러내놓고 자본주의에 적대적이었다. 그들은 재산권과 시장의 본질을 끝내 이해하지 못했고 우리 체제에 어긋나는 정책들을 시도했다. 그들의 실패는 궁극적으로 거기서 찾을 수 있다.

노무현 정권의 후신이라 할 수 있는 현 정권은 노무현 정권의 실패가 반시장적 정책을 제대로 펴지 못한 데서 나왔다고 본다.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의 원리에 어긋나는 정책을 무리하게 추진한다. 심지어 부유한 사람들의 재산권을 ‘적폐’로 여긴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기는 힘들지 않다. 옳은 교훈을 얻기가 힘들다. 실패를 다른 사람의 잘못으로 돌리고 실패한 정책을 더욱 강력하게 시행해야 한다고 믿는 것은 쉽고 달콤한 선택이다. 현 정권의 태도를 보면 프랑스 혁명 뒤 영국으로 망명한 루이 16세의 조신들에 대해 샤를 뒤무리에 원수가 한 말이 떠오른다. “그들은 하나도 잊지 않았고 아무것도 배우지 않았다.”

복거일 < 사회평론가·소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