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보여요"… 삼성 개발자 3인, 착한기술에 눈뜨다
코가 책에 닿을 듯한 모습으로 책을 읽던 시각장애인 A군에게 삼성전자 직원이 가상현실(VR) 기기인 ‘기어 VR’을 건넸다. “우와 신기하다. 마치 정상인처럼 보여요.” 안경을 써도 시력표 최상단 글자를 겨우 읽는 A군은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서울시 수유동의 시각장애인 특수학교인 한빛맹학교에서 기어 VR의 성능을 시험한 장면이다. 이 학교의 김찬홍 교사는 “A군과 같은 시각장애인은 작은 표지판을 읽기가 어려워 지하철 타는 것도 두려워한다”며 “장애인 학생들이 기어 VR을 써보고 굉장히 놀라워하고 기뻐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삼성 “빛을 돌려드립니다”

삼성전자가 시각장애인의 시력을 높여주는 ‘기어 VR’ 전용 모바일 앱(응용프로그램) ‘릴루미노’를 20일부터 일반인에게 무료로 배포하기 시작했다. 삼성전자 스마트폰으로 릴루미노 앱을 내려받아 기어 VR에 설치하는 단순한 작동 원리 때문에 세계 시각장애인들이 비상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기존의 시력 보조 기기는 1000만원이 넘는 고가 상품인데도 시력 개선 효과가 그다지 높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기어 VR 가격은 15만원 안팎에 그친다. 삼성전자는 릴루미노의 영상처리 알고리즘 관련 특허 두 건을 지난해 11월과 올해 7월 출원했다. 릴루미노는 ‘빛을 돌려준다’는 의미의 라틴어다.

릴루미노는 삼성전자의 사내 벤처 프로그램인 ‘C랩’에서 나왔다. C랩은 사내 공모전을 통해 선정된 과제에 대해 1년간 현업에서 벗어나 스타트업처럼 자유롭게 근무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제도다. 이재일 삼성전자 창의개발센터 상무는 “실패해도 부담 없이 현업에 복귀할 기회를 제공해 내부 조직의 벽이나 기존 상식에 얽매이지 않고 혁신을 추구하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엄마, 보여요"… 삼성 개발자 3인, 착한기술에 눈뜨다
◆단순한 호기심에서 시작

실제 아이디어를 처음 내놓은 조정훈 C랩 크리에이티브 리더는 기어 VR사업과 전혀 관련 없는 모바일 무선통신 분야의 15년차 연구원이다. 릴루미노 개발팀은 그를 포함해 단 3명. 조 리더는 “지난해 2월 시각장애인이 선호하는 여가순위 1위가 TV 시청이라는 인터넷 뉴스를 보고 거짓말이 아닐까라는 작은 호기심에서 연구를 시작했다”며 “조사해봤더니 전체 시각장애인의 87%가 사물을 조금씩은 볼 수 있는 저시력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전했다.

삼성전자는 △장애인이 독서나 TV 시청을 원하고 △값싼 시각 보조 기기에 대한 수요가 있으며 △70% 넘는 시각장애인이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현실을 고려할 때 릴루미노의 사업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2014년 8월 기준 세계 시각장애인은 약 3억 명이며, 이 중 저시력 장애인은 2억5000만 명에 달한다.

◆연말까지 안경 형태로 개발

릴루미노의 시력 개선 핵심 원리는 기어 VR에 장착된 스마트폰 카메라로 들어오는 영상을 VR 기술을 통해 시각장애인이 인식하기 쉬운 형태로 바꿔주는 것이다. 노인성 질환으로 늘어나고 있는 황반변성은 망막의 중심부 신경 조직이 손상되면서 일부 사물이 일그러지거나 중앙부가 뻥 뚫린 듯 시커멓게 보이는 등의 시각 장애다. 삼성전자의 VR 기술은 이렇게 손상된 이미지를 눈이 정상적으로 볼 수 있는 위치로 옮겨 시력을 회복시킨다.

지난 7개월여의 임상시험 결과 교정 시력 0.1 수준의 시력이 릴루미노를 착용하면 0.8~0.9 수준으로 개선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상시력의 80~90% 수준이다.

이 같은 성과에 힘입어 릴루미노팀은 1년간 C랩 후속 과제를 추진할 계획이다. C랩이 시작된 2012년 이후 연구기간을 연장한 첫 사례다. 목표 과제는 기어 VR보다 크기를 줄이고 편의성을 강화한 안경 타입의 시력 개선 제품을 출시하는 것이다.

좌동욱 기자 leftki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