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 장난감 업체 레고는 파산 위기에 몰린 2004년 한 독일 소년에게서 얻은 ‘스몰데이터’를 통해 제품 개발과 사업 영역의 방향을 전환하며 부활의 발판을 마련했다. 지난해 1월 중국 상하이에 개장한 ‘레고랜드 디스커버리센터’. 한경DB
덴마크 장난감 업체 레고는 파산 위기에 몰린 2004년 한 독일 소년에게서 얻은 ‘스몰데이터’를 통해 제품 개발과 사업 영역의 방향을 전환하며 부활의 발판을 마련했다. 지난해 1월 중국 상하이에 개장한 ‘레고랜드 디스커버리센터’. 한경DB
2000년대 들어 인터넷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디지털 시대가 열렸다. 이 과정에서 생겨난 방대한 데이터와 이를 활용하는 기술이 ‘빅데이터(big data)’다. 거대한 데이터를 보유한 글로벌 정보기술(IT) 기업이 고안한 빅데이터 분석 기법은 오늘날 고객과 트렌드를 이해하는 새로운 경영 패러다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런 기법을 활용한 성공 사례가 잇따르면서 빅데이터는 산업과 생활 전반에 빼놓을 수 없는 기술 키워드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빅데이터만으로 의미있는 통찰 결과를 얻어낼 수 없다는 지적도 있다. 이미 나온 데이터를 분석해 특정 패턴을 발견하고 트렌드를 예측할 수는 있지만 정량적 분석만으론 혁신적 제품이나 서비스를 도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한계가 드러남에 따라 최근 주목받고 있는 개념이 ‘스몰데이터(small data)’다.

[책마을] 빅데이터로 망할 뻔한 레고, 한 소년의 운동화가 살렸다
스몰데이터는 개인의 취향이나 필요, 건강 상태, 생활 양식 등에서 나오는 ‘작은 정보’를 의미한다. 개인의 충족되지 않은 요구나 욕망을 나타내는 사소한 행동을 총칭한다. 거대한 양의 데이터를 분석해 결과를 도출하는 빅데이터와는 접근 방식이 다르다. 마치 탐정이나 형사처럼 소비자의 실제 생활 속으로 들어가 개인의 사소한 행동을 세밀하게 관찰해 혁신의 단서를 찾는다.

《쇼핑학》 《오감 브랜딩》 《누가 내 지갑을 조종하는가》 등 마케팅 분야의 영향력 있는 책들을 쓴 덴마크 출신 브랜드컨설턴트 마크 린드스트롬은 이른바 ‘빅데이터 시대’에 스몰데이터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대표주자 중 한 명이다. 그는 최근작 《스몰데이터》에서 “빅데이터에 매몰돼 놓치기 쉬운 스몰데이터야말로 쇠퇴하는 브랜드를 반전시키는 혁신적인 방법이나 획기적인 아이디어의 토대가 된다”고 강조한다.

저자가 주로 하는 일은 세계 각국 기업에서 의뢰를 받아 소비자 가정을 방문해 스몰데이터를 수집, 제품과 서비스 혁신의 단서를 찾고 새로운 비즈니즈 기회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는 지난 15년간 세계 77개국을 돌아다니면서 2000곳이 넘는 가정에서 시간을 보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세심하게 관찰해 소비자의 숨겨진 욕망을 찾아냈다. 그가 수집한 스몰데이터가 어떻게 해석돼 비즈니스에 결정적 영향을 줬는지 수많은 사례와 실천적 방법이 이 책에 가득하다.

린드스트롬은 덴마크 블록장난감회사 레고가 부활하는 계기를 제공한 ‘낡은 운동화 한 켤레’ 이야기로 책을 시작한다. 1990년대 후반부터 비디오 게임 유행과 중국산 저가 장난감의 득세로 실적이 악화된 레고는 빅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1990년 이후 태어난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가 인내심이 부족하고 충동적이며 즉각적인 만족감을 원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2003년 블록 크기를 키워 신제품을 출시했다. 그러자 오히려 판매가 30% 급감했고 회사가 문 닫을 지경에 처했다. 2004년 최고경영자(CEO)로 영입된 조르겐 빅 크누드스톱은 세계 각국의 가정과 소매상을 방문해 장난감에 대한 고객의 생각을 세세하게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그 결과 ‘기본으로 돌아가라’는 처방을 내렸다.

이 처방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레고 마니아이자 열정적인 스케이트보더인 열한 살 독일 소년과의 인터뷰였다. ‘가장 자랑스럽고 소중한 물건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소년은 한쪽 면이 울퉁불퉁하게 닳은 운동화를 가리키며 “내가 우리 동네에서 가장 스케이트보드를 잘 탄다는 것을 입증하는 우승컵이자 금메달”이라고 답했다. 레고는 이 스몰데이터에서 레고만이 가진 특성과 스토리텔링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이후 레고는 빅데이터 분석과는 반대로 블록의 크기를 더 작게, 조립 설명서는 더 상세하게 제작했고, 영화 ‘해리포터’ ‘스타워즈’ 등과 제휴한 ‘레고무비’로 장난감에 스토리텔링을 입혔다. 레고는 극적으로 파산 위기를 넘겼고, 2014년 매출이 사상 최초로 세계 최대 완구제조사인 마텔을 넘어섰다.

로봇청소기 룸바가 스몰데이터에서 얻은 통찰로 매출 부진에서 벗어난 사례도 흥미롭다. 빅데이터는 룸바 제조사에 기술 혁신을 통해 제품의 소음과 부피를 줄이도록 했지만 저자가 룸바 구매자에게 얻은 스몰데이터는 달랐다. 소비자들은 룸바를 가전제품이 아니라 애완동물처럼 다뤘고, 애칭도 지어 불렀다. 기능 못지않게 ‘우~웅’하는 소리와 귀여운 디자인 등을 중시했다. 린드스트롬은 룸바 기술진에게 첨단 기능으로 없어진 룸바의 감성적 요소를 되살리라고 주문했다.

저자가 빅데이터의 유용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린드스트롬도 브랜딩 전략을 수립할 때 빅데이터 정보를 적극 활용한다. 다만 저자는 기업들이 빅데이터에만 쏠려 소비자를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스몰데이터 전략을 무시하거나 간과하는 경향을 경고한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균형’이다. 저자는 “빅데이터는 과거 패턴을 분석할 뿐 미래를 보여주지는 못한다”며 “빅데이터와 스몰데이터의 결합은 21세기 마케팅이 생존하고 성공하는 데 중요한 요소”라고 주장한다.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