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형규 칼럼] 존 롤스의 '정의론' 국정철학이 되다
흔히 “세상은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고 한다. 요즘엔 한 술 더 떠 만사가 운이라는 소위 ‘운칠복삼(運七福三)’이 회자된다. 손자병법도 용장, 지장, 덕장 위에 복장(福將)을 꼽지 않았나.

‘운칠복삼’에 대한 강한 반작용이 ‘헬조선’ 신드롬과 ‘금수저론(論)’이지 싶다. ‘노오오오~력’을 해도 안 되고, 격차가 대물림된다는 불만이다.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이라는 젊은이들이 넘쳐나는데 철없는 정 아무개는 “너희 부모를 탓하라”고 했으니 ‘국민 비호감’이 될 수밖에….

부모 잘 만난 것처럼 타고난 운에 의한 불평등은 공정하지 못하다. 이를 체계화한 분배정의 철학자가 존 롤스 하버드대 교수(1921~2002)다. 롤스의 《정의론》(1971)이 새삼 문재인 정부의 ‘국정운영 5개년 계획’에 인용돼 관심을 모은다.

롤스는 ‘정의(正義)는 곧 공정(公正)함’이라고 정의(定義)했다. 사회가 공정하려면 기본적 자유와 권리가 평등 분배돼야 하고(평등의 원칙), 불평등은 최소 수혜자의 삶이 보다 개선되는 조건에서 용인된다(차등의 원칙)는 것이다. 따라서 소득과 분배를 우연(시장)에 맡기는 자본주의 체제는 정의롭지 못하다는 관점이다.

그의 사상은 미국에서 인종, 성, 종교 등의 차별이 극심했던 1960년대 형성됐다. 그 시절 흑인 여성은 영화 ‘히든 피겨스’처럼 이중 핸디캡이었다. ‘자연의 로또(타고난 운)’가 초래한 이런 격차는 국가가 개입하라는 롤스의 주장은 타당하다.

《정의론》은 1970~80년대 퍼주기 논란에 휩싸였던 유럽 사회민주당 정권들엔 복음과도 같았다. 미국 등 많은 나라가 저소득층 복지, 소수자 보호, 지역균형, 높은 상속세, 경제력 집중 억제 등의 근거로 삼았다. 평생 ‘서민의 철학’을 견지한 롤스는 ‘하버드의 성자(聖者)’로 불렸다.

하지만 그의 사상엔 구조적 맹점이 있다. 롤스는 우월한 실력, 노력, 재능까지도 타고난 운으로 간주했다. 사실 두뇌, 품성, 인내력 등 어느 것 하나 부모로부터 물려받지 않은 게 없다. 김연아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행운적 요소를 하나씩 제거하다 보면 남는 게 없다. 공정한 분배는 추첨뿐인데, 이야말로 진짜 ‘운빨’ 아닌가.

최근 도입된 블라인드 채용도 롤스식 접근법이다. 이력서에 사진을 떼고 학교, 학점 등까지 지우고 나면, 롤스의 용어로 ‘무지의 베일’에 가깝게 된다. 20여 년 노력이 배제되고 면접 때 인상으로 채용이 결정되는 게 공정한가. 취준생 사이트에서 논쟁이 한창이다.

롤스가 보호해야 한다고 본 기본권은 정치적 자유다. 롤스는 투표권과 언론·결사·사상 등의 자유를 특히 중시했다. 반면 경제적 자유와 사유재산은 정의사회와 무관하다고 봤다. 그렇기에 사회주의도 충분히 공정할 수 있다는 시각이다.

하지만 역사는 경제적 자유를 위해 정치적 자유를 쟁취해온 과정이었다. 사유재산제를 부정한 사회에는 민주 정부가 없다(민경국 강원대 교수). 롤스는 1990년대 초 공산주의 붕괴를 목도하고도 1999년 《정의론》 개정판에서 전혀 수정하지 않았다. 롤스 사상의 또 다른 맹점이다.

그간 문재인 정부의 정책에 갸우뚱하는 전문가들이 많았지만 롤스의 관점에서 보면 또렷해진다. 그제 5개년 계획에서 “정의로운 제도만이 공정한 사회를 만들고, 이것이 정부와 정치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롤스의 재림이다.

하지만 롤스 사상을 추종할 때 꼭 유의할 점이 있다. 타고난 운의 불평등을 추적하다 보면 자칫 국가개입 만능주의에 빠질 수 있다. 정부가 ‘정의의 이름으로’ 시시콜콜 간섭하는 한 경제 활력을 기대할 수 없다. 국가가 보장할 것은 행복추구권이지 행복권이 아니지 않은가.

시장경제는 경제적 자유와 기업가의 기회 포착으로 번영을 이뤘다. 김연아도 타고난 운 덕에 피겨의 여왕이 된 게 아니다. 재능을 발견하고 부단한 노력 끝에 성공한 게 공유재라면, 아무도 노력하지 않을 것이다. 약자에게 양극화보다 더 나쁜 결과가 하향평준화다.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