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호령하고 있는 포퓰리스트들. 왼쪽부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마린 르펜 프랑스 국민전선(FN) 대표,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 한경DB
세계를 호령하고 있는 포퓰리스트들. 왼쪽부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마린 르펜 프랑스 국민전선(FN) 대표,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 한경DB
1870~1890년 미국 중서부와 남부의 농산물 가격은 종전의 3분의 2 수준으로 떨어졌다. 그런데도 독점적 지위를 누렸던 철도회사는 농산물 운송비를 크게 올렸고, 정부와 정치권은 농민의 고통을 외면했다. 1870년대 텍사스에서 시작된 농민동맹이 남부 전체와 북부로 확대되고, 1892년 인민당 결성으로 이어진 것은 이 때문이었다.

인민당은 자유방임주의라는 당시 미국의 지배적 세계관에 도전했다. 철도 국유화, 누진소득세, 비밀투표와 상원의원 직선제를 포함한 정치개혁을 요구했다. 농민이 연방정부로부터 돈을 빌려 농작물 가격이 충분히 오를 때까지 보관해두는 ‘분고(分庫)’ 계획도 제안했다. 이들의 요구는 지나치게 급진적이라는 이유로 주요 정당이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그중 상당 부분이 훗날 뉴딜 정책과 뉴딜 자유주의 세계관에 통합됐다.

[책마을] 좌든 우든…포퓰리스트는 침묵하는 다수 노린다
《포퓰리즘의 세계화》는 미국 인민당을 발원지로 한 포퓰리즘과 포퓰리스트가 어떻게 형성되고 전 세계적으로 전개됐는지를 살핀 책이다. 지난해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을 정확히 예측한 저자는 미국은 물론 유럽, 남미 각국의 좌우파 포퓰리즘 전개 양상을 구체적으로 소개하면서 포퓰리즘 실체에 다가선다.

저자에 따르면 미국 좌파 포퓰리즘은 인민당에서 시작해 ‘우리의 부를 공유하자’는 운동을 펼친 휴이 롱, 월스트리트 점령운동을 거쳐 지난해 민주당 경선에서 돌풍을 일으킨 버니 샌더스로 이어진다. 우파 포퓰리즘은 1960년대 펜실베이니아 주지사를 지낸 조지 윌리스부터 로스 페로, 팻 뷰캐넌, 티 파티를 거쳐 트럼프로 이어져왔다.

트럼프는 대선 과정에서 미국 우선주의와 함께 과격해 보이는 주장을 쏟아냈다. 동맹국에 대한 비용 분담 요구, 북미자유무역협정과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반대, 기업 본사 및 공장의 해외 이전 반대 등…. 멕시코계 및 무슬림 이민자에 대한 반감도 가감 없이 드러냈다. 공화당원들조차 당혹스러워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침묵하는 다수의 대변자’라며 이렇게 주장했다. “기득권층, 미디어, 특별 이익단체, 로비스트, 기부자들이 모두 저와 맞서고 있습니다. 저는 미국 국민이 위대한 일을 이룰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저자는 이런 트럼프의 공약과 주장이 전형적인 포퓰리즘이라고 강조한다. 특히 모든 무슬림의 입국 금지, 중국산 수입품에 대한 45% 관세 부과, 멕시코 국경 장벽 설치 등은 실현 가능성이 낮다고 누구나 인정하는 제안들이다. 하지만 자신의 책 《거래의 기술》에서 밝혔듯이 트럼프는 ‘약간의 과장’이 제품을 파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는 사람이다. 이 또한 포퓰리즘적 전술이라는 얘기다.

트럼프는 왜 그토록 과격한 주장을 하게 됐을까. 저자에 따르면 포퓰리스트는 언제나 자신들과 대립하는 최상류층 엘리트를 자기 잇속만 차리며 비민주적이라고 규정하면서 보통 사람들(국민)을 그 엘리트에 대항하도록 결집시키려고 한다. 좌익이든 우익이든 이런 점에서는 별 차이가 없다. 트럼프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상식을 벗어나는 과격한 주장을 통해 이른바 ‘침묵하는 다수’의 관심을 결집하는 데 성공했다. 민주당과 공화당의 ‘기득권층’이 놓치고 있던 백인 소외층의 침묵을 그가 대변한 것이다.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포퓰리즘의 등장 배경이다. 그는 “국민이 지배적인 정치규범과 자신들의 희망, 두려움, 관심사가 충돌한다고 여길 때 포퓰리스트는 방치된 관심사를 극적으로 표현하고 이를 정치의 틀 속으로 끌어와 국민이 저항하도록 유인한다”고 강조한다. 포퓰리즘의 등장은 지배적인 정치이념과 표준적인 세계관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수리가 필요하다는 신호라는 것. 이것이 바로 미국에서 트럼프와 샌더스를, 유럽에서 좌파와 우파 포퓰리스트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라고 저자는 말한다.

서병훈 숭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책머리에 실린 해제에서 “지배적인 정치규범이 보통 사람들의 희망이나 걱정거리와 불일치하는 시간과 장소가 바로 포퓰리스트들의 활동 공간”이라며 “포퓰리즘이 발흥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원인과 그것이 민주주의의 가면을 쓰고 있는 실태를 직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