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생 배출도 못하고 원전학과 문 닫을 판"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석·박사 통합과정(5년)에 재학 중인 대학원생 두 명이 최근 지도교수에게 중도 졸업 신청서를 내고 박사학위를 포기했다. 이들은 박사 취득과 원자력 관련 연구자를 목표로 매진해 왔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의 ‘탈(脫)원전 선언’을 보고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담당 교수도 그저 “알겠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학생들에게 불투명한 미래를 강요할 순 없지 않으냐”며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새 정부의 갑작스러운 탈원전 정책에 따라 원자력 관련 학과가 설치된 서울대 한양대 등 주요 대학마다 비상이 걸렸다. 2009년 ‘한국형 원전’의 아랍에미리트(UAE) 수출 이후 학과를 개설하고 인재 양성에 나섰던 부산대 세종대 포스텍 등은 첫 졸업생이 나오기도 전에 학과 문을 닫아야 할 처지다. 연구자의 길을 포기하는 사람 외에 학부과정에서도 전과나 복수 전공 등으로 방향을 급선회하는 전공자가 속출하고 있다.

공사비 1조6000억원이 투입된 신고리 원전 5·6호기 공사의 잠정 중단을 발표한 지난 27일 이후 혼란이 증폭되는 양상이다. 시민배심원단에게 사업 재개 여부를 맡기는 의사결정 방식이 정당한지에 대한 이의 제기가 잇따르고 있다. 최신 기술이 집약된 신고리 원전의 건설 중단은 관련 학계에는 사망선고와 같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서울의 한 사립대 교수는 “준비 기간도, 논의도 없이 대통령 말 한마디에 40년을 이어온 에너지 정책이 좌지우지되는 게 온당한 처사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국내에 원자력 관련 학과 및 전공이 개설된 대학은 총 16곳이다. 1950년대 학과를 개설한 서울대와 한양대가 효시로 꼽힌다. 지난 19일 영구정지된 국내 첫 원전인 고리1호기가 1972년 착공에 들어간 이후 KAIST 경희대 조선대 제주대 등이 잇따라 관련 학과를 개설했다.

국내 원자력 연구와 투자는 한반도 비핵화(非核化) 선언에 따라 핵무기 개발 및 제조와 관련 없는 원전에만 집중돼왔다. 이에 따라 원전이 국내 학계 인력 수요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약 50~60%, 산업계 비중은 70~80%에 달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서울대 원자핵공학과만 해도 전임교원 14명 중 8명이 원전 연구자다.

이명박 정부가 2009년 성사시킨 한국형 원전의 아랍에미리트(UAE) 수출은 국내 학계에서 원자력공학과 열풍을 일으켰다. 2011년 부산대를 시작으로 세종대 중앙대 포스텍 등 6곳이 관련 학과·전공을 신설했다.

그 결과 한 해 배출되는 원자력 인재(학·석·박사 졸업자)는 2005년 220명에서 2014년 553명으로 10년 만에 두 배 이상 늘었다. 지난해는 600명에 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원전을 ‘수출 효자’로 육성하려던 정부 정책이 불과 5년 만에 뒤집히자 국가적 지원 아래 학과를 신설한 대학들은 초상집 분위기다. 세종대는 2015년 대학원을 설립해 2016년 첫 박사과정생을 모집했다. 부산대는 2011년 학부에 ‘원자력시스템 전공’을 신설하고 2015년 첫 전공자를 배출했다. 비슷한 시기 관련 학과를 설립한 서울의 한 사립대 관계자는 “졸업생도 채 나오기 전에 신입생 씨가 말라 폐과(閉科)할 지경”이라고 전했다.

역사가 오래된 대학의 위기감도 신생대에 못지않다. 1958년 국내 최초로 원자력공학과를 설립한 한양대에는 학부생의 전과·복수전공 신청이 쇄도하고 있다. 제무성 한양대 원자력공학과 학과장은 “상당수 학생이 복수전공이나 전과를 문의해 오고 있다”며 “국내 원자력 기술은 UAE 원전 위원회에서도 ‘코리아 테크놀로지’로 불릴 정도로 최고 수준인데 이를 유지해나갈 인재의 명맥이 끊길 수 있다”고 경고했다.

대학들은 학생들의 불안감 해소를 위한 대책 마련에 나섰다. 세종대는 다음 학기부터 진로 교육과 원전정책 설명회를 겸한 정기 세미나를 열 계획이다.

집단행동에도 나섰다. 지난 1일 전국 23개 대학 에너지 전공 교수 230명이 정부의 성급한 탈(脫)원전 정책을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을 주도한 주한규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는 “인공지능·전기차 시대의 도래로 전기 수요가 폭증할텐데 섣불리 탈원전에 나섰다가는 인재난으로 기술 속국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황정환/박진우 기자 j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