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눈물 젖은 '달러 박스'…원양어업 60년
우리나라 최초의 원양어선 지남호(指南號)가 부산항을 출발한 것은 1957년 6월29일. 배 이름은 ‘남쪽으로 뱃머리를 돌려 부(富)를 건져 올리라’는 뜻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지어줬다. 7월18일 대만 해상에서 첫 조업을 시도했지만 허탕만 쳤다. 필리핀과 싱가포르 해역에서도 실패했다. 참치연승(긴 낚싯줄에 여러 개의 낚시를 달아 잡는 방식)을 해 본 선원이 아무도 없었다. 유일한 경험자인 미국인 어업 고문은 인도양에 도착하기 전 허리를 다쳐 대만에서 하선했다.

8월15일 새벽 마침내 사람 키만 한 참치를 잡는 데 성공했다. ‘광복절 참치’여서 의미가 더 컸다. 윤정구 선장은 무선으로 고국에 낭보를 알렸다. 보름간 10t가량을 잡은 뒤 10월4일 부산으로 귀항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참치(실제로는 새치)를 비행기로 공수해 경무대 뜰에 걸어놓고 외국 대사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만큼 외화 획득에 목을 매던 시절이었다.

이듬해 윤 선장은 남태평양 사모아로 향했다. 훗날 동원그룹을 일군 김재철 회장도 실습항해사로 따라갔다. 사모아 근해에서 1년여 동안 잡은 참치 450t으로 번 돈은 9만달러. 거액이었다. 배 한 척으로 시작한 한국 원양어선은 1970년대 후반 850척으로 늘었고 선원도 2만3000명에 이르렀다. 아프리카의 라스팔마스 등 세계 28곳에 기지를 둘 정도였다.

1970년대 초 원양 수산물은 총수출의 5%를 차지했다. 지금의 주요 수출품목인 자동차부품(5%) 휴대전화(6%) 등과 거의 맞먹었다. 1965~1975년 획득한 외화만 6억6347만달러였다. 같은 기간 독일 파견 광부와 간호사들의 송금액(1억153만달러)보다 6배나 많다.

이 피 같은 돈은 목숨을 담보로 한 것이었다. 파도에 휩쓸려 수장된 선원이 부지기수였다. 새벽 조업 중 다른 배에 부딪혀 30여 명이 떼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월급은 고국으로 부치고 최저생계비로 버티느라 뼈가 부러져도 참고 견뎠다. 3년만 고생하면 집을 장만할 수 있다는 꿈이 없었다면 견디기 힘든 생활이었다. 목숨을 잃은 선원들은 대부분 현지에 묻혔다. 사모아와 라스팔마스 등 8곳의 묘지에 묻힌 영혼이 327명이나 된다.

원양 선원들의 땀과 눈물은 파독 광부·간호사나 중동 근로자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다. 사모아와 라스팔마스 선원묘지에 새긴 박목월 시인의 헌사만 그들을 쓸쓸히 기억할 뿐이다. ‘땅끝 망망대해 푸른 파도 속에 자취없이 사라져 갔지만 우리는 그들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한국 원양어업의 현주소는 초라하다. 1992년 100만t이던 어획량은 지난해 45만t으로 줄었다. 우리 선원들이 떠난 해역을 일본과 중국 어선들이 떼로 휩쓰는 현실을 제대로 아는 사람도 많지 않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