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나 백화점이 문을 열지 못해 분쟁을 벌이는 지역은 현재 전국에 수십 곳이 있다. 때로는 인근 시장 상인들이 마트를 열지 말라고 시위하기도 한다. 하지만 27일 경북 구미시 선산봉황시장에 문을 연 이마트 노브랜드 전문점 개점식 분위기는 달랐다. 인근 상인들은 이날을 ‘축제의 날’이라고 불렀다. 기자간담회에도 시장 상인들이 함께 참석했다. 다른 마트와 달리 시장 상인들이 요청해 전통시장 한복판에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사진)이 말한 ‘새로운 시도’가 시장 상인과 마트의 전통적 적대관계까지 바꿔놓고 있음을 보여준 장면이었다.
청년 상인이 먼저 제안한 '정용진의 상생 2탄'
장날 빼곤 장사 안 돼

선산봉황시장은 경북 지역 최대 5일장이 열리는 곳이다. 장이 서는 날에는 106개 상시 점포 외에 500여 개 노점이 생기고, 하루 최대 2만여 명의 방문객이 찾는다. 하지만 장날이 아니면 손님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게 상인들의 고민이었다. 1993년 현대식 상가 건물을 지었지만 2층은 거의 비어 있었다.

시장에서 천연비누 등 생활용품점을 운영하는 상인 김수연 씨(39)는 올초 시장상인회에 “이마트를 들어오게 하자”고 제안했다. 이마트가 운영하는 ‘청년상인 아카데미’ 교육에서 당진어시장 사례를 접한 영향이었다. 이마트는 작년 8월 당진어시장 안에 노브랜드 전문점을 열었다. 시장 상인들이 판매하는 축산물, 신선식품은 빼고 과자 라면 등 가공식품과 가정간편식(HMR) 위주로 상품을 구성한 ‘1호 시장 상생형 매장’이다. 김씨는 “이마트가 오면 상권이 살아날 것”이라며 시장 상인들을 설득했다.

정부 창업 지원 대상으로 뽑힌 청년 상인들도 이마트 입점을 희망했다. “이마트가 오면 해볼 만하다”며 창업을 주저하던 청년들이 힘을 보탰다.

“젊은 사람들이 시장을 바꿔보겠다”며 똘똘 뭉쳐 상인회 동의를 구했다. 시장 상인회는 청년 상인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106개 점포 상인 모두가 이마트 상생 스토어 입점에 동의했다. 구미시도 지난달 유통업상생발전협의회를 열어 입점을 최종 승인했다.

시장에서 안 파는 1200여 개 상품

청년 상인이 먼저 제안한 '정용진의 상생 2탄'
이마트는 선산봉황시장점을 자체 브랜드(PB) 상품만 취급하는 노브랜드 전문점, 전통시장 상인, 청년 창업자가 공존하는 상생형 매장 형태로 꾸몄다. 임대가 안 돼 24년간 방치된 상가 건물 2층 공간을 쓴다. 매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나오는 게 청년 창업자들이 운영하는 청년몰이다. 2층 전체 1650㎡(약 500평) 공간 중 절반인 825㎡(250평)를 청년몰이 차지하고 있다. 현재 17곳이 들어섰고 앞으로 22개로 늘어날 예정이다. 정효경 청년몰사업단장은 “당초 11곳밖에 없었는데 이마트가 들어선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창업 희망자가 늘었다”고 전했다.

노브랜드 전문점은 420㎡(125평) 규모다. 시장에서 판매하는 채소 과일 축산물 등 신선식품은 없다. 가공식품과 공산품 위주로 1200여 개 품목을 진열했다. 시장에서 팔지 않는 수산물 코너를 별도로 넣은 것도 특징이다. 전통시장에서 찾기 힘든 고객 편의시설도 갖췄다. 아이들 놀이터(118㎡), 고객 쉼터(66㎡)를 별도 공간에 새로 마련했다. 이갑수 이마트 사장은 “앞으로 다양한 경제 주체들과 지혜를 모아 진정한 상생을 이룰 수 있는 방식을 만들어 나가겠다”고 말했다.

“먼저 시도하고 시행착오 통해 성장”

이 색다른 상생 모델은 정용진 부회장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이기도 하다. 그는 지난주 열린 하반기 경영전략회의에서도 “이마트가 멋진 이유는 항상 새로운 것을 가장 먼저 시도하고 가장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성장했다는 것”이라며 “앞으로도 두려움 없이 새로운 시도를 먼저 해달라”고 말했다.

지난해 문을 연 당진 상생형 매장도 이런 시도의 결과였다. 이 소식을 접한 선산봉황시장 상인들이 이마트에 입점을 요청하기에 이른 것이다. 정 부회장은 대형마트 등 전통적 유형의 유통산업이 성장에 한계를 보이는 상황에서 노브랜드 상생형 매장처럼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고 보고 있다.

그는 “불과 15년 만에 대형마트의 매출이 반토막 난 일본처럼 국내도 편의점같이 더 가깝고, 온라인쇼핑몰처럼 더 편하고, 복합쇼핑몰 같은 더 즐거운 업태에 밀려 선택받지 못할 수 있다”고 위기감을 나타냈다. 이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기업가 정신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혁신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안재광 기자 ahnj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