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가 무려 8개월치 일감에 달하는 시내버스 주문을 쌓아놓고도 노동조합의 증산 거부로 중국 독일 등 해외 경쟁 업체에 시장을 내줄 위기에 놓였다. 국내 버스회사와 지방자치단체 등이 기존 계약을 취소하거나 주문량을 줄이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승용차와 대형 트럭에 이어 버스마저 수입차에 시장을 내주면 협력업체들의 일감과 고용 유지에도 큰 차질이 예상된다.

버스 주문 2000대 밀려도…현대자동차 '속수무책'
25일 국토교통부 등에 따르면 올해 시내버스 신차 시장 규모는 약 5700대로 전망된다. 지난해 4342대에서 30%가량 증가했다. 올해는 시내버스 법정 내구연한(9년)에 맞춰 교체 수요가 많이 몰리는 시기인 데다 대기환경 규제 강화에 따라 압축천연가스(CNG) 버스의 교체 주문도 크게 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현대차에만 현재 2000여 대의 시내버스 주문이 밀려 있다. 현대차 전주공장의 버스 생산량이 월평균 250대인 점을 고려하면 8개월치 일감이 쌓여 있는 셈이다. 차량 생산과 인도가 하염없이 늦어지자 현대차를 향한 운수업체들의 불만이 폭주하고 있다.

승용차와 달리 버스는 ‘적기 공급’이 대단히 중요하다. 운수업체가 차량 내구연한을 어기면 노선 면허를 박탈당하거나 예정된 증차 기회를 잃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전국버스운송사업조합연합회가 지난 4월 현대차에 시내버스 적기 공급을 촉구하는 항의 공문을 보낸 뒤 계약을 취소하는 사례도 자주 나타나고 있다.

운수업체들은 올 들어 지난 5월까지 총 214대의 버스 주문을 철회했다. 1월 28대에서 2월 39대, 3월 65대, 4월 42대, 5월 40대 등으로 늘고 있다. 현대자동차는 취소된 주문이 대부분 국내외 경쟁업체에 넘어간 것으로 보고 있다.

수도권 지역 선진운수는 현대차와의 계약을 파기하고 독일 업체인 만트럭버스코리아의 천연가스 저상버스 30대를 구매하기로 했다. 최근에는 대전의 한 운수업체가 중국산 버스 구매를 협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또 중국 선룽버스는 현대차의 생산량 정체를 틈타 경기 의정부, 동두천, 포천, 연천, 강원 철원 등의 벽오지 노선을 뛰는 운수회사에 버스 공급을 확대하고 있다.

버스 주문 2000대 밀려도…현대자동차 '속수무책'
서울 지역을 운행하는 버스회사 대표는 “지금처럼 6개월 이상 주문이 밀려 있으면 품질이 좀 나빠도 중국산 버스를 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지방자치단체도 현대차를 점차 외면하는 분위기다. 서울시 등 일부 지자체는 국제 입찰을 통해 중국산 등 해외 업체로부터 버스를 수입해 공급 부족분을 대체할 계획이다.

현대차는 올초부터 노조 측에 버스 증산을 지속적으로 요청했지만 노조는 계속 거부하고 있다. 현대차 전주공장의 시간당 버스 생산대수(UPH)는 0.67대다. UPH는 생산 효율을 나타내는 지표로, UPH가 0.67이면 버스를 세 시간에 두 대꼴로 생산한다는 의미다.

회사 측은 UPH가 1.0대는 돼야 수요를 어느 정도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 달에 120대 이상을 추가 생산할 수 있는 수준이다. 과거 물량이 늘어났을 때 노사 합의로 UPH를 올린 적도 있다. 현대차 노사는 작년 11월부터 지난 4월까지 투르크메니스탄 정부가 발주한 시내버스 500대 생산을 위해 UPH를 0.87대로 30%가량 끌어올렸다.

그러나 증산 협상은 강성인 전주공장 노조(현대차 노조 전주위원회)의 반대로 난항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버스 생산량을 늘리려면 다른 차종도 물량을 늘려야 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지난 5월 말 대의원대회에서 ‘시내버스 물량 조정 없음’을 결의했다. 노조는 또 업무 능력 미달 등으로 해고된 일부 조합원 복직, 노조활동 방해 중단 등도 요구하고 있다. 전주공장 노조 관계자는 “지난해 11월 증산 당시 회사 측에 카운티 등 다른 차종 물량 확보를 요구했으나 회사가 받아들이지 않아 신뢰가 깨졌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같은 양상을 놓고 노조 내부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한 현장 대의원은 지난 5월 대자보를 통해 “몰려오는 시내버스 물량도 처리하지 못하면서 다른 차종 생산 물량을 내놓으라며 증량을 막는 것은 전주공장을 닫게 하는 파행의 길”이라고 지적했다.

현대차는 과거 대형트럭 부문에서도 노조의 생산 증량 거부로 밀려드는 주문을 제때 소화하지 못해 외국 업체에 안방을 내준 쓰라린 경험이 있다. 공급 지연에 고객들이 이탈하면서 수입 대형트럭의 점유율은 2010년 20%에서 지난해 40%까지 올라갔다.

지난해 국내 버스시장에서 현대차 점유율은 61.5%로 전년의 63.9%에 비해 소폭 떨어졌다. 또 내수·수출을 포함한 전주공장의 버스 생산량은 2015년 1만3981대에서 지난해 1만2701대로 줄었다.

강현우 기자 h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