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모르게 결혼 당했다"…매년 1000건 혼인 무효소송
홀몸노인 한모씨(67)는 2015년 ‘강제 결혼’을 당했다.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한씨의 재산 50억원을 가로채려던 김모씨(61)의 짓이었다. 한씨와 일면식도 없던 김씨는 훔친 신분증과 위조 인감으로 구청에 혼인신고서를 냈다. ‘배우자’가 된 김씨는 공범들과 함께 한씨를 폭행·협박해 50억원을 뜯어냈다. 이어 법적 보호자의 권한을 이용해 한씨를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혼인신고 제도의 허점을 이용한 범행이었다. 어처구니없는 범행은 2년가량 지난 올 4월 경찰에 의해 뒤늦게 적발됐다. 하지만 한씨가 정신병원에 있어 혼인무효소송 등 원상회복절차는 아직 시작도 못 한 상태다.

‘몰래 혼인신고’ 권하는 사회

안경환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낙마로 이어진 ‘몰래 혼인신고’가 우리 사회에 충격파를 던졌다. 극성 팬이 몰래 한 혼인신고 때문에 여자 연예인이 도미(渡美)했다는 식의 가십을 간간이 듣긴 했지만 평범한 사람들과는 먼 일이라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안 전 후보자의 어이없는 일은 40여 년 전에 벌어졌다. 하지만 지금도 강제 결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상대의 신분증과 도장만 있으면 일방적인 혼인신고가 가능하다. 신랑·신부가 최소 한 명씩 증인을 세워야 하지만 미리 준비한 제3자의 주민등록번호와 주소지를 써넣기만 하면 무사통과다.

도장이 진짜 배우자의 것인지 확인하는 절차도 없다. ‘막도장’을 파 찍으면 그만이라는 얘기다. 혼인신고 접수 후 확인 절차도 허술하다. 일부 구청에서 ‘혼인신고가 처리됐음을 알려드립니다’라는 문자메시지로 통보하는 게 전부다. 그나마 개선된 게 이 정도다. 2007년 5월 가족관계등록법이 개정되기 전에는 신분증도 요구하지 않았다. 상대방 이름과 주민번호 등 인적사항만 알면 일방적인 신고가 가능했다.

허술한 제도 탓에 실제 강제 결혼 피해자도 속출하고 있다. 대법원 사법연감에 따르면 2013년부터 2015년까지 3년간 혼인무효·취소 소송 건수는 매년 1000건이 넘는다. 막상 혼인신고가 되면 혼인무효를 입증하기가 그리 간단치 않다. 혼인신고서 자체가 당사자에게 혼인 의사가 있었다는 법적 증거자료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법원 관계자는 “혼인이 합의 없이 이뤄졌다는 명백한 증거가 있어야 혼인무효 판결이 난다”고 설명했다.

혼인신고 때 당사자 불참 시 확인 절차 강화해야

결혼한 적이 없는데 이혼해야 하는 황당한 일도 생긴다. 작년 1월 의정부지방법원이 기각한 A씨(29)의 혼인무효소송이 그런 사례다. A씨는 2012년 B씨(25)와 사귀면서 장난 삼아 혼인신고서를 써줬다. 철없던 B씨는 A씨 몰래 시청에 혼인신고서를 제출했다. 둘은 4개월여 사귀다 헤어졌지만 각자 결혼을 준비하면서 잊고 있던 혼인신고서가 서로의 발목을 잡았다. 사귀던 여자친구에게 파혼을 당한 A씨가 혼인무효소송을 냈지만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법률혼주의를 취하는 국내 법제 아래서는 무효를 이해할 만한 충분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는 게 법원의 판단이었다.

선진국처럼 혼인신고제도를 엄격하게 운영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미국·독일·프랑스 등이 대표적 사례다. 이들 국가에서는 혼인신고 전에 ‘혼인예비절차’를 거친다. 당사자 두 명과 증인이 모두 출석해 공무원·판사 앞에서 혼인 의사를 확인하고, 혼인으로 발생하는 의무에 대해 설명을 듣는 과정이다. 선택을 돌이켜볼 숙려기간도 있다. 섣불리 결혼을 결정해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취지다.

방정현 정앤파트너스 변호사는 “협의 이혼 시에는 쌍방이 반드시 법정에 출석해 당사자 본인 여부와 이혼 의사 합치 여부에 대해 판사의 확인을 받는다”며 “혼인신고에도 이와 비슷한 절차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국에서도 문제 제기는 오래전부터 있었다. 관련법 개정 움직임도 시작됐다. 김석기 자유한국당 국회의원 등 10명은 지난 5월 혼인신고제도를 개선하는 ‘가족관계의 등록 등에 관한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다. 신고 시 두 사람 모두가 직접 출석하지 않을 때는 반드시 당사자의 혼인 의사 확인 절차를 거치도록 하는 내용이다. 시·읍·면의 장이 신고 때 불참한 혼인 당사자의 본인 여부와 혼인 의사를 전화 자동응답시스템(ARS)을 통해 확인하는 방식이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