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무 화학처리물질 제조·수입업체인 A사는 11개의 유해 화학물질을 취급하고 있다. 중견 화학업체에서 경력을 쌓은 연구원들이 독립해 설립한 회사로 지난해 매출 56억원, 영업이익 5억원을 올릴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환경부가 지난해 말 국회의 ‘가습기살균제 사고 국정조사특별위원회’에 재발 방지 대책으로 화평법 개정을 제시하면서 A사 직원들은 급격히 흔들리고 있다.
화학물질 1개 등록비만 수억원인데…7000개로 늘리겠다는 환경부
◆위해우려물질?

환경부는 당시 ‘국내에서 연간 1t 이상 쓰이는 화학물질은 모두 등록해야 국민의 건강과 안전을 보호할 수 있다’는 명분을 내놓았다. 이에 따라 등록대상물질 대폭 확대(510종→7000여 종), 등록의무 위반에 대한 과징금 신설(매출의 5%) 등의 개정안을 마련했다. 신고 의무가 있는 유해화학물질(800여 종)을 위해우려물질(1300여 종)로 확대할 것이라는 방안도 포함시켰다.

기존 화평법 아래서도 연간 6억원의 등록비용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터에 “엎친 데 덮친 격이 돼버렸다. 이대로 가면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A사 대표)는 아우성이 나온다. 이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기업들은 전자제품, 생활용품 등 모든 제품에 함유된 1300여 종의 위해우려물질을 일일이 파악해 신고해야 한다. 위해우려물질은 기존 800여 종 유해화학물질의 개념을 더 확대한 것이다. 워낙 종류가 많다 보니 중소기업은 물론 대기업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규제가 될 것이라는 우려다.

◆실태 어떻길래?

2015년부터 화평법이 시행된 가운데 지금까지 고작 5종의 화학물질만 등록된 것은 이 법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착상에서 비롯된 것임을 여실히 보여준다는 지적이다. 기업이 유해화학물질을 등록하려면 원칙적으로 정부 지정 시험기관에서 받은 폭발성, 유독성, 산화성 등 수십 가지 항목에 대한 시험자료를 첨부해야 한다. 수입업체는 해당 물질을 생산한 해외 기업에서 관련 자료를 받아 국내 시험기관에서 인증받아야 한다.

이 비용이 공무원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막대하다는 게 중소기업계의 항변이다. A사는 취급 중인 11종의 화학물질을 등록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을 총 29억여원으로 추산하고 있다. 비용 분담을 위해 물질마다 다른 기업들과 공동등록 협의체를 구성했지만 여전히 A사가 부담해야 할 비용은 최대 6억원에 이른다.

특히 이 회사가 100t 이상 수입하는 한 물질은 해외 수출업체가 자료 제공을 거부해 골머리를 앓고 있다. 국내 화학물질 등록 관련 컨설팅업체에 문의했더니 검사비 6억원에 총 34주가 걸린다는 답변을 들었다.

화평법 등록 시한이 다가오면서 A사처럼 사업을 중단하겠다는 중소기업이 속출하는 이유다. B사는 2개의 등록 대상 물질 가운데 1개에만 3억6000만원의 견적을 받고 망연자실하고 있다. 지난해 영업이익 4억5000만원의 80%에 달한다. 나머지 1개 물질은 비용 추산도 아직 못했다.

C사는 타이어 고무 처리용 화학물질을 독점 수입하는 업체여서 공동등록 협의체조차 구성하지 못했다. 15억원에 달하는 등록비용을 혼자 부담해야 할 판이다. 직원 110명에 지난해 매출 500억원, 영업이익 32억원을 거뒀지만 영업이익의 절반을 등록에 써야 하는 상황이다. C사가 수입을 중단하면 국내 타이어산업에도 타격이 불가피하다.

◆대책은 있나?

화평법 등록 시한은 내년 6월 말이다. 환경부가 2015년 1월부터 이 법을 시행하면서 510종의 물질에 대해 같은 해 6월 말부터 3년간 등록 받는다고 예고했기 때문이다. 이 기간에 등록하지 않으면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억원 이하의 벌금 처벌을 받는다.

환경부는 당초 화평법 시행을 앞두고 기업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지원책을 마련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산업현장에선 턱없이 부족하다는 반응이다. 지난 4월 말 기준 510종의 등록대상 물질 중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89종, 17.5%에 불과하다. 공동등록 협의체가 구성된 물질도 510종 중 376종에 머물고 있다. 나머지 134종은 해당 기업이 비용을 전부 혼자 부담해야 한다.

시험기관 등 인프라가 턱없이 부족한 것도 문제다. 화학물질을 등록하려면 전문 분석인력과 장비를 갖춘 시험기관을 통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 정부로부터 지정받은 국내 시험기관은 30개에 불과하다. 특정 시험자료는 아예 분석할 수 있는 국내 기관이 없다. 결국 해외로 나갈 수밖에 없다.

■ 화평법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 화평법에 따라 기업은 모든 신규 화학물질과 연간 1t 이상 제조·수입·판매하는 기존 화학물질을 매년 환경부에 등록해야 한다. 2015년 1월부터 시행됐다.

강현우 기자 h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