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화학업계 '연금술사' 된 AI
독일 화학기업 머크는 지난 9일 인공지능 화학 프로그램 ‘케마티카’(사진)를 개발한 연구기업 GSI(Grzybowski Scientific Inventions)를 인수했다고 발표했다. ‘화학계의 알파고’라 불리는 케마티카는 화학물질을 스스로 합성하고 최적의 경로를 알려주는 인공지능(AI) 프로그램이다. 1000만 개의 화학 물질과 문헌 속의 수많은 화학 반응을 기억하고 학습해 화합물의 적절한 합성 방법을 인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계산해낸다. 케마티카는 이를 통해 51개의 제품 포트폴리오에서 45%의 생산 비용 절감을 이뤄냈다. 기존 합성물의 최적 합성법에서 한 단계 진화해 새로운 화합물을 합성해내는 데도 성공했다.

연구원들이 주로 담당하던 화학 기업의 최적화 업무를 빅데이터, AI 프로그램이 속속 대체하고 있다. 다양한 조합을 반복적으로 실험하는 업계 특성상 연구 기간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어서다. 경험과 감에 의존하던 과거와 달리 데이터를 통한 과학적 결론 도출도 늘어나고 있다.

국내 기업도 빅데이터 프로그램을 개발해 구매 단계에서부터 비용 절감을 이뤄내고 있다. LG화학 선행최적화기술(AOT)팀은 석유화학 제품의 핵심 원료인 나프타 가격을 최장 8주까지 예측할 수 있는 ‘나프타 가격 예측모델’을 개발해 운영 중이다. 원유 가격과 석유제품 가격 추이, 각종 환율 데이터 등 총 176가지 변수를 입력해 나프타 가격을 예측할 수 있도록 한 프로그램이다. 예측모델은 나프타 단기 거래에 주로 쓰인다. 단기 거래를 통한 나프타 구매액은 한 해 3조~4조원가량이다. 정확한 가격을 예측해 저가에 구매하는 방법으로 1%의 구매 비용을 낮추면 한 해 300억~400억원을 아낄 수 있다.

쉐브론, 엑슨모빌 등 글로벌 석유회사들은 이미 빅데이터를 활용한 과학적 최적 운영을 통해 연간 10억달러 이상 추가 수익을 창출하고 있다. 국내 정유사 중에서는 SK이노베이션이 빅데이터 분석 프로그램 ‘크로노스’를 개발해 운영 중이다. 크로노스를 통해 세계 300여 종의 원유 가치를 분석하고, 5만여 개의 변수를 고려해 최적의 제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 원유 조합 비율을 찾아낸다.

화학물질의 위험성을 줄이기 위한 ‘안전 관리’ 차원에서도 활용된다. 일본은 AI와 빅데이터를 활용한 화학물질 안전 심사 방법을 2019년부터 도입할 계획이다. 그동안 화학물질 안전심사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물고기에 화학물질을 먹여 물질의 축적도를 조사하는 작업만 평균 1년이 걸렸다. 심사 세부 절차를 차례로 거치고 제품화하기까지 최대 3년 정도가 필요했다. 하지만 빅데이터로 가상실험을 대체하면 시간과 비용 모두 절약할 수 있다.

SK이노베이션은 울산 공장에 ‘스마트 플랜트’ 시스템을 도입했다. 스마트 플랜트는 지금까지 발생한 유해가스 유출 사고 이력과 원인을 빅데이터로 분석해 유출 사고가 빈번하게 이뤄지는 공정은 무엇인지, 이 공장에서 어떤 징조가 있을 때 유해가스가 누출되는지를 분석한 것이다.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