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기·군함 잇단 오작동…전투기는 추락할 뻔
트랙터 등에 쓰는 싸구려 윤활유를 미국산 고급 제품으로 둔갑시켜 군 당국에 납품한 업자가 경찰에 붙잡혔다. 문제가 된 윤활유는 군용 항공기의 추락위험을 야기하는 등 심각한 사태를 불렀다. 허술한 군납 시스템이 군 전투력을 훼손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다.

◆항공기 헬기 함정 줄줄이 오작동

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는 질 낮은 저가 윤활유를 고급 제품으로 위장해 군에 납품한 혐의(공문서 위조·행사,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상 사기)로 모 화학업체 대표 이모씨(58)를 구속하고 직원 두 명을 불구속 입건했다고 25일 발표했다. 이씨는 2014년 4월부터 지난해 6월까지 위조품을 방위사업청에 34차례 납품하고 15억원을 가로챈 혐의를 받고 있다. 위조품 규모는 드럼통 489개, 들통 82개, 캔·튜브 등 용기 3만3990개에 달한다.

공군 항공기, 해군 헬리콥터와 군함 등 군용 장비에는 특수 윤활유가 들어간다. 하지만 이씨는 국방 규격에 미달하는 국내산 저가 윤활유를 고급품으로 둔갑시켰다. 트랙터나 오토바이에 주로 사용하는 이 윤활유를 넣은 항공기 일부에서는 기체 진동, 엔진 실린더 헤드 균열 등이 발생했다. 추락 위험에 조기 회항하기도 했다.

해군 주력 헬기에서도 기체 손상 위험이 발견됐으며, 함정의 추진 제어장치 전자기판이 녹는 일도 벌어졌다.

군 부사관 출신인 이씨는 군 당국의 제품 검수가 허술하다는 점을 노렸다. 군은 별다른 절차 없이 수량과 포장 상태, 파손 여부만 눈으로 확인하고 있다. 고급 미국산 수입품으로 꾸미기 위한 계획도 치밀했다. 저가 윤활유를 빈 용기에 넣어 미국의 페이퍼컴퍼니에 수출한 뒤 국내로 역수입하는 수법을 썼다. 이 과정에서 미국 A사 제품 라벨을 위조해 붙이고 시험성적서와 수입신고필증도 허위로 제출했다.

경찰 관계자는 “납품 과정에서 군 관계자들과 유착 관계는 확인되지 않았다”며 “안보도 희생양으로 삼을 수 있는 장삿속이 놀라울 뿐”이라고 했다.

◆화력발전소에도 가짜 터빈유 ‘아찔’

이씨는 2014년 12월 국내 한 화력발전소에 2300만원 상당의 발전기 엔진용 터빈 작동유를 납품하면서 같은 범행을 한 혐의도 받고 있다. 화력발전소 역시 납품 업체가 제출하는 시험성적서 등의 진위를 확인하지 않고 제품 외관만 본다는 점을 악용했다. 시험성적서, 물질안전보건자료 등 관련 서류를 위조한 것이다.

다행히 해당 화력발전소는 기존 유압유 재고를 소진하느라 가짜 터빈유를 쓰지 않았다. 해당 제품을 실제로 썼다면 화재 위험이 매우 높았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화재 발생 시 정비에만 한 달가량이 걸리기 때문에 90억원 상당의 피해와 하루 910만㎾에 달하는 전력 공급 중단이라는 아찔한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

방사청과 군은 뒤늦게 재발 방지에 나섰다. 방사청 관계자는 “검수 과정 시 정품인지 확인한 뒤 값을 치르고, 시험성적서 위·변조 여부를 철저하게 확인하는 절차를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발생한 피해에 대해 해당 업체를 대상으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진행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경찰은 이씨가 2008년부터 군 입찰에 참여해 납품해 온 만큼 다른 범행이 있었을 것으로 보고 수사를 확대할 방침이다.

이현진 기자 appl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