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17회 공판이 열린 서울중앙지법에서 반올림 측은 "삼성 직업병을 해결하라"며 소란을 피웠다. 사진=이진욱 기자
24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17회 공판이 열린 서울중앙지법에서 반올림 측은 "삼성 직업병을 해결하라"며 소란을 피웠다. 사진=이진욱 기자
언더도그마(underdogma). ‘언더도그는 힘이 약하다는 이유만으로 선하고 고결하며, 오버도그는 힘이 강하다는 이유만으로 비난받아 마땅하다’는 믿음이다. 이 믿음의 문제는 사실관계에 상관없이 힘의 정도에 따라 조건반사적으로 도덕적 우위가 결정된다는 점이다. 물론 우위는 약자의 차지다. 언더도그마의 오류는 약자의 일방적 주장을 진실로 둔갑시키기도 한다. 이때 강자의 주장은 중요치 않다. 일반 시민들의 눈에 약자들이 들고있는 피켓 속 문구는 이미 진실이기 때문이다.

24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17회 공판이 열린 서울중앙지법. 이날 재판에 앞서 시민단체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회원이 펼침막을 꺼내다가 법원 직원에게 제지당하는 광경이 연출됐다. 이들은 지난 19일에도 재판에 출석하는 삼성그룹 임원들에게 "이재용을 엄벌하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반올림은 삼성전자의 이 부회장을 비롯한 주요 임원들이 출현하는 공식 일정에 늘 따라다닌다. 반올림은 활동가 2명, 변호사 1명, 실무자 1명 그리고 피해자 가족 2~3명 정도로 구성됐다. 이들은 2007년 6월 창립 이후 삼성과 관련된 이슈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등장했다. 삼성 수뇌부가 나타나면 가로 막고 망신을 주는 식이다. 여기저기서 플래시가 터지면 더 강한 제스처를 언론 앞에 보이기도 한다. 대외적으로 삼성을 깎아내리면서 협상에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겠단 의도다.

반올림과 삼성전자의 반도체 백혈병 논란은 올해로 11년째다. 2007년 3월 삼성전자 기흥공장 근로자 황유미씨가 급성 백혈병으로 사망하면서 촉발됐다. 삼성전자는 2014년 권오현 부회장이 사과하고, 기금 1000억원을 마련해 협력사 직원까지 포함한 피해자들에게 보상해주고 있다. 2015년 9월부터 지금까지 120여명이 보상을 받았다. 삼성전자는 정부에서 산업재해로 인정받지 못한 이들에게도 자체 기준에 따라 보상과 사과를 했다.

이는 발병 원인이 확인돼서 보상하겠다는 의미라기보다 피해자 가족의 아픔을 우선적으로 줄이겠다는 경제적 지원에 가깝다. 삼성은 직업병 발병 원인의 명확성을 따지기보다 우선적으로 보상에 초점을 맞춰왔다.

양측은 각각 법률 대리인을 선임해 지난해 5월부터 비공개 협상을 하고 있다. 오랫동안 대치하면서 양측 모두 감정이 상한터라 직접 대화는 어려워 대리인 간 협상을 진행중이다. 그러나 별다른 진전은 없는 상황이다. 반올림이 삼성 측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주장만을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어서다. 양측은 보상 기준부터 반도체 사업장의 상황까지 다양한 부분에서 첨예한 대립을 지속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2014년 4월 반도체 공장 근로자의 백혈병 발병 등 문제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삼성전자는 2014년 4월 반도체 공장 근로자의 백혈병 발병 등 문제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일방적인 보상 기준 vs 조정위 권고안 준수

반올림은 삼성전자의 보상 방식을 문제삼고 있다. 이들은 삼성 측이 일방적으로 보상 기준을 정해 신청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삼성전자의 보상대상 질병과 최소재직기간, 퇴직후 발병시기 등 보상기준은 2015년 7월 제3자 조정위원회가 제시한 권고안을 거의 원안대로 따르고 있다. 위로금 등의 산정방법은 보상 접수 홈페이지를 통해 상세히 밝혔다.

삼성전자는 "보상 창구는 지금도 열려 있고 대상자들은 언제든지 신청해서 보상받을 수 있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반올림은 ‘배제 없는 보상’을 주장하며 보상을 거부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이미 120여 명에 대한 보상이 완료된 것을 이유로 상당 부분 해결이 됐다는 입장인 반면 반올림 측은 삼성이 조정권고안에 못 미치는 임의적인 보상기준을 적용했다고 반박하고 있다.

◆화학물질을 공개하라 vs 이미 대부분 공개

반올림은 삼성전자가 영업비밀을 이유로 반도체 사업장에서 사용하는 화학물질을 공개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삼성전자는 "화학물질은 안전보건공단 산하 산업안전보건연구원 홈페이지를 통해 대부분 공개돼 있다"고 맞받았다.

실제 홈페이지에 공개된 '반도체산업 근로자를 위한 건강한관리 길잡이'란 제목의 문서엔 각 공정별로 사용되는 화학물질과 유해 요인, 노출 시 증상, 관리 방법 등이 100여 페이지에 걸쳐 상세히 나와있다.

실제로 산업안전보건연구원 홈페이지 자료실에는 3년간(2009~2011년) 실시한 연구결과에 기초해 만든 자료를 배포하고 있다. 화학물질관리법에 따라 환경부가 모든 사업장의 화학물질 취급 현황과 배출량을 정기적으로 조사해 홈페이지에 공개하고 있다.

다만 각 공정별로 어떤 물질이 얼마나 쓰이는지는 삼성전자의 지적 자산이어서 외부에 노출될 우려가 있는 경우 정보보호법에 의해 영업비밀로 보호받고 있다. 영업비밀 지정 범위에 대해선 법이 정한 구체적 규정이 없어 외부 전문가로 구성된 옴부즈만위원회가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고 있다. 옴부즈만위원회는 삼성전자와 가족대책위원회, 반올림이 합의해 구성한 중립적인 기구다.
반도체 백혈병 논란은 2007년 3월 삼성전자 기흥공장 근로자 황유미씨가 급성 백혈병으로 사망하면서 촉발됐다. 사진=반올림
반도체 백혈병 논란은 2007년 3월 삼성전자 기흥공장 근로자 황유미씨가 급성 백혈병으로 사망하면서 촉발됐다. 사진=반올림
500만원만 지급 vs 증빙자료 공개 가능

반올림은 삼성전자가 백혈병 피해자 가족 故황유미 씨의 아버지 황상기 씨에게 터무니없이 적은 500만원만 지급했다며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역시도 설득력을 얻지 못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이와 관련 "피해 당사자가 자필로 서명한 퇴직원을 보존하고 있으며 확인이 필요하다면 공개할 수 있다"며 "몇 차례에 걸쳐 지급된 치료비와 위로금 등의 증빙자료를 보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반올림은 이러한 증빙자료를 인정하기는 커녕 일방적인 주장만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부터 이어진 최순실의 국정농단 사태와 연결해 '피해자에겐 500만원, 정유라에겐 500억원'이라는 문구로 이슈몰이에 나서기도 했다.

피해자만 300명 vs 명단 제출 요청 거부

반올림은 지금까지 접수된 피해자가 300명에 달한다는 주장을 지속적으로 펼치고 있다. 그러나 이 역시도 명확한 근거가 없다. 더군다나 피해자 규모가 수시로 변경되고 있다. 반올림이 기자회견을 통해 공개한 사망자 숫자가 그 이전 토론회에서 발표한 숫자보다 줄어든 경우도 있다. 반올림의 일방적인 주장으로만 여겨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반올림과의 협상 과정에서 수차례 명단 제출을 요청했지만 실제 존재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명단은 받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이진욱 한경닷컴 기자 showg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