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에서 뇌물을 받은 혐의 등으로 기소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 씨, 뇌물공여 혐의로 기소된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정식 재판이 23일 서울중앙지방법원 대법정 417호에서 열렸다. 사진공동취재단
대기업에서 뇌물을 받은 혐의 등으로 기소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 씨, 뇌물공여 혐의로 기소된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정식 재판이 23일 서울중앙지방법원 대법정 417호에서 열렸다. 사진공동취재단
“박근혜 피고인, 직업이 어떻게 됩니까.”(재판장 김세윤 부장판사) “무직입니다.”(박근혜 전 대통령)

53일 만에 모습을 드러낸 ‘수인번호 503번’ ‘박근혜 피고인’의 얼굴에는 긴장과 무표정이 묘하게 교차했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낙담이 스치며 전체적으로 어두웠다. 그러나 예의 올림머리에 정자세로 3시간(10분 휴정 포함) 재판 내내 정면을 응시했다. 수의 대신 짙은 남색 정장 차림이었다.
'503번 피고인' 박근혜 전 대통령, 3시간 내내 무표정…울먹인 최순실에 눈길 안줘
◆朴, 올림머리에 정자세로 정면 응시

역사적 재판이 열린 서울중앙지방법원 417호 대법정. 재판 시작 10시 정각을 10여 분 앞두고 이원석 특수1부 부장검사와 한웅재 형사8부 부장검사 등 8명의 검사가 먼저 입장했다. 곧이어 최순실 씨 측 이경재 변호사와 박 전 대통령 측 유영하 변호사가 법정에 들어섰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23일 왼쪽 옷깃에 ‘수인번호 503호’ 배지를 달고 눈을 감은 채 재판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반
박근혜 전 대통령이 23일 왼쪽 옷깃에 ‘수인번호 503호’ 배지를 달고 눈을 감은 채 재판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반
9시59분. 소란스럽던 법정이 순간 조용해졌다. 재판장 김세윤 부장판사가 입장했다. 방청객 68명과 취재진 등이 150석을 가득 채웠다. 김 부장판사가 재판 시작을 알리고 피고인 출석을 명하자 박 전 대통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취재진의 플래시 세례와 방청석의 들썩임에도 박 전 대통령은 미동이 없었다. 이어 ‘40년지기’ 최씨가 들어왔다. 두 사람의 만남은 8개월 만이다. 하지만 재판 내내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국민참여재판 의사가 있느냐는 재판부 질문에 박 전 대통령은 일어서더니 “원하지 않습니다”고 답했다.

박 전 대통령은 담담했지만 검찰과 변호인의 공방은 불꽃 튀었다. 이 부장검사와 한 부장검사가 번갈아 가며 공소사실을 설명하자 박 전 대통령은 작은 한숨을 수차례 쉬었다. 박 전 대통령 측 유 변호사는 예상대로 18개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팽팽한 긴장이 엄습했다. 재판장이 박 전 대통령의 의견을 묻자 단호하게 “변호인 입장과 같습니다”고 답했다.

◆‘檢 돈봉투 만찬’ 거론하며 반박도

유 변호사는 “검찰 증거의 상당수가 언론기사”라며 “언제부터 기사를 증거로 제출했는지 묻고 싶다”고 했다. 최근 불거진 ‘돈봉투 만찬’도 거론했다. 이 부장검사와 한 부장검사가 만찬 현장에 자리했다는 점을 의식한 반박이었다. 유 변호사는 이번 사건의 논리를 적용하면 돈봉투 만찬 당사자들은 ‘부정처사 후 수뢰죄’에 해당하는 것 아니냐고 공격했다. 최씨 측 이경재 변호사도 검찰이 ‘재단출연 기업 중 일부만 선별해 뇌물로 기소하는 변화무쌍한 공소기술을 발휘하는데, 이는 공소권 남용’이라고 주장했다. 검찰은 “여기는 정치적 법정이 아니다”며 불만이 섞인 강한 어조로 반박했다.

재판 병합을 두고도 팽팽히 맞섰다. 유 변호사는 ‘최씨 재판이 여러 차례 진행돼 둘을 합치면 예단을 줄 우려가 있다’며 반대했지만 재판부는 “예단이나 편견 없이 재판하겠다”며 검찰 손을 들어줬다. 재판 일정이 빡빡하다는 요구에 대해서도 “증거조사 분량이 많아 매주 4차례 재판이 불가피하다”며 강행군 의사를 밝혔다.

김 부장판사는 ‘박근혜 피고인’이라 불렀고, 검사들은 ‘박근혜 전 대통령’ ‘박근혜 피고인’ 등의 표현을 섞었다. 최씨는 감정이 북받치는 듯했다. 인적사항 확인 때 울먹이고 “40여년 지켜본 박 전 대통령을 재판정에 나오게 한 제가 죄인”이라며 자책하기도 했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측도 “공소사실이 사실과 다를 뿐 아니라 법리적으로도 의문”이라며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구치소·법원 앞 지지자 몰려

박 전 대통령 참모들이 눈에 띄었다. 김규현 전 외교안보수석, 배성례 전 홍보수석, 허원제 전 정무수석 등이 재판을 지켜봤다. 박 전 대통령의 동생 박근령 씨는 “흉악범도 아닌데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대통령도 조롱하는데 어떻게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말을 할 수 있느냐”고 주장했다.

지지자들은 새벽부터 법원 서울구치소 등으로 모여들어 무죄를 주장했다. 오전 9시8분께 구치소에서 박 전 대통령을 태운 호송버스가 중앙지법 입구에 들어서자 고성과 탄식이 터져나왔다. “대한민국 사법부가 미쳤다”는 고함과 함께 “언론 때문에 잡혀갔다”며 취재진을 향해 따지기도 했다. “박 전 대통령은 무죄다. 조속히 석방하라”는 내용의 영문 피켓도 등장했다.

3시간의 재판이 끝나고 박 전 대통령이 오후 1시14분 법원을 빠져나갈 때도 지지자 30여 명은 태극기를 흔들며 “건강하세요” 등의 구호를 연신 외쳤다. 경찰은 법원 인근에 6개 중대 480여 명의 병력을 배치했으나 별다른 충돌은 없었다.

이상엽/박진우 기자 ls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