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과장&이대리] 180도 달라진 정책에 '멘붕'…"영혼 없는 공무원이란 말 실감"
대통령선거가 끝나고 새 정부가 들어섰지만 김과장 이대리들에겐 여전히 후유증(?)이 만만치 않다. 9년 만에 이뤄진 정권 교체로 함박웃음을 짓는 직장인과 이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이들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어서다. 회식 자리에선 문재인 대통령을 지지하는 부하 직원과 지지하지 않는 상사 간 논쟁이 벌어질 때도 있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등 새 정부의 주요 정책을 놓고서도 갑론을박(甲論乙駁)이 한창이다. 공직사회는 더하다. 각 부처 공무원들은 정권 교체로 180도 바뀐 정책을 마련하고 검토하느라 ‘멘붕’ 상태에 빠졌다. “영혼 없는 공무원의 운명”이란 자조 섞인 말까지 나온다. 새 정부 출범과 함께 아직도 정치 논쟁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김과장 이대리들의 얘기를 들어봤다.

‘상전’ 바뀐 공무원들

9년 넘게 보수 정권에 맞춰 일해온 공무원들은 새 정부 출범으로 ‘상전’이 바뀌면서 후유증을 앓고 있다. 정권이 바뀌면서 사회·경제 논리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한 경제부처 공무원인 하모씨(45)가 대표적 사례다. 공직생활 대부분을 세제 업무로 보낸 하씨는 지난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낮은 법인세율’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 당시 야당이던 더불어민주당과 시민단체 등은 “대기업에서 더 많은 법인세를 거둬들여 복지 등 분배정책 재원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씨는 각종 경제학 이론은 물론 해외 사례 등을 총동원해 “법인세율을 높이면 회복세로 돌아선 경제가 타격을 입는다”는 정부 입장을 뒷받침하는 논리 마련에 주력했다.

하지만 조기 대선을 거쳐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상황은 극적 반전했다. 문 대통령이 법인세 실효세율 인상을 위한 대기업 비과세 감면 축소, 초고소득 법인의 최저한세율 인상 등을 공약했기 때문이다. 이런 방법으로도 재원이 부족하면 법인세 명목세율을 높이겠다고도 했다. 하씨는 이제 법인세율 인상과 대기업 과세 강화가 필요하다는 정부 논리를 짜는 데 골몰하고 있다. 그는 “아무리 ‘영혼 없는 공무원’이라지만 너무 가혹한 것 아니냐”고 토로했다.

반면 새 정부 출범에 반색하며 기대를 나타내는 공무원들도 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중용됐다가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변방만 맴돌며 숨죽여 지낸 이들이 대표적이다. 경제부처 김모 서기관은 “지난 정부에서 찌그러져 있던 몇몇 국·과장 얼굴에 모처럼 웃음꽃이 활짝 폈다”고 전했다.

관가 분위기는 뒤숭숭하다. 새 정부가 들어선 지 2주가 지났지만 각 부처 장관·차관 인선이 계속 늦어지고 있어서다. 박근혜 정부에서 임명된 장관들은 이미 전원 사표를 제출했다. 차관들도 집에 갈 날만 꼽으며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모습이다. 차기 정부 정책 수립을 맡은 일부 공무원은 문 대통령의 대선공약집을 펴놓고 ‘열공모드’에 돌입했다. 하지만 상당수는 ‘윗선’의 지시가 분명치 않아 눈치만 보며 우왕좌왕하고 있다. 최모 사무관은 “빨리 고위직 인사가 나서 조직에 활기가 돌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문모닝~’ 인사에 ‘헉’

민간기업에서는 문 대통령 지지자들의 환호성과 비(非)지지자들의 한숨이 엇갈리고 있다. 서울의 한 출판사에 근무하는 윤모씨(37)는 매일 오전 직장 선배가 보내는 ‘문모닝~’이라는 카톡 메시지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박지원 전 국민의당 대표가 19대 대선 때 문 후보자를 비난하는 말로 하루를 시작한다는 뜻에서 나온 ‘문모닝’은 문 대통령이 당선된 뒤 지지자들 사이에서 인사말로 통하고 있다. 문제는 윤씨의 선배 박모씨는 직장 내에서도 유명한 문 대통령 지지자지만, 윤씨는 그렇지 않다. 윤씨는 “사실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자를 지지했지만 사실대로 말하면 선배와의 사이가 껄끄러워질 것 같아 말을 꺼내지 못한 게 화근”이라며 답답해했다.

김과장 이대리들 사이에선 새 정부 정책을 두고도 찬반양론이 벌어진다. 새 정부의 일자리 대책 중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정책이 대표적이다. 한 유통업체에 다니는 김모 대리(33)는 최근 인천공항공사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해주기로 한 사례를 두고 직장 상사인 최모 과장과 설전을 벌였다. “좋은 일자리를 늘려야 한다”는 주장과 “늘어난 임금 비용은 누가 지불할 것이냐”는 반박이 맞붙었다. 이후 두 사람은 어색한 사이가 됐다. “앞으로는 사무실에서 정치 얘기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김 대리의 말이다.

대학가도 시끌

대학 내 직장인들 사이에서도 비슷한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 대부분 비정규직으로 이뤄진 비학생 노조가 정규직 전환을 요구한 서울대가 가장 시끄럽다. 학내 행정을 도맡아하던 비정규직 직원인 비학생 조교들이 준정규직(무기계약직) 전환과 임금보전을 외치며 지난 15일 총파업에 나섰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정규직 교직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리고 있다.

한 단과대 교직원 김모씨(30)는 “비학생 조교 선생님들의 파업 후 학교 사무실에서도 비정규직 문제를 놓고 직원들 간에 한바탕 설전이 벌어졌다”며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기존 정규직 직원들의 생각이 저마다 달라 학교 안에서 서로 말을 꺼내기 부담스러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정권이 바뀌면서 대학 교수사회도 들썩이고 있다. 새 정부 요직에 대학 교수 출신 인사가 여럿 오르면서다. 청와대에 입성한 교수들에게 줄을 대기 위한 작업(?)도 시작됐다는 후문이다. 한 사립대 교수는 “이번에 청와대에 들어간 A교수와 친하지 않느냐는 전화를 하루에 서너 번씩 받고 있다”며 “10여 년간 연락 한번 없던 대학 동창이 대뜸 전화해 청와대에 들어간 교수와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한 경우도 있다”고 했다.

이수빈 기자 ls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