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도요타자동차를 일으킨 힘
올해 창업 80주년을 맞은 일본 도요타자동차의 약진이 눈부시다. 2009년 자동차 가속페달 결함 문제로 전 세계에서 1000만대를 리콜하는 사상 초유의 위기를 극복하고 정상에 복귀한 저력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도요타자동차는 1937년 설립 이래 ‘품질의 도요타’ ‘글로벌 도요타’를 적극 실천해 왔다. 코롤라 캠리 렉서스 등 히트 차종을 출시하고 해외 시장 진출을 추진해 도요타 신화를 창조했다. 2008년 제너럴모터스(GM)를 제치고 세계 1위에 등극했다. 그러나 2009년 대규모 리콜로 치명타를 입었다. 도요다 아키오가 대표로 취임해 ‘제2의 창업’이라는 자세로 위기를 극복했다.

최근 실적은 눈부시다. 2014~2016년 3년 연속 판매량 1000만대를 달성했다. 올 4월 기준 시가총액 세계 1위로, 독일 다임러벤츠와 폭스바겐을 압도했다. 2016년 매출 28조4000억엔, 영업이익 2조8500억엔, 순익 2조3100억엔을 기록했다. 종업원 수도 34만8000명에 달한다.

경쟁력의 원천은 무엇인가. 첫째로 뛰어난 노사관계를 꼽을 수 있다. 1950년 1600명의 정리해고를 둘러싸고 격렬한 파업을 겪은 뒤 대가족주의 정신에 바탕을 둔 종신고용과 노사화합을 최우선시했다. 도요타 강령 4조에는 ‘주위 사람에 대한 우애의 정신을 가지며 가정적인 팀워크를 구축한다’는 내용이 있다. 도요타시는 16세기 전국시대 미카와번에 속했다. 도쿠가와 막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고향이다. 그는 촌스럽지만 강인하고 주군에 대한 충성심으로 똘똘 뭉친 미카와 군단을 이끌고 다케다 신겐,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과 자웅을 겨뤄 천하를 쟁취했다. 정상의 글로벌 기업이 된 것은 우직한 ‘미카와 기질’이 종업원의 마음가짐에 깊이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도요다 가문과 전문경영인의 협치도 빼놓을 수 없다. 오너 가문은 주식의 2% 정도를 소유하고 있지만 중추적 역할을 맡고 있다. 오쿠다 히로시 회장은 “도요타그룹에 도요다 가문은 회사 설립의 구심력이며 깃발”이라고 강조한다. 공대 출신의 기이치로와 에이지 대표는 ‘기술 중시’ ‘현장 중심’ 시스템을 구축했다. 1950년 파업 위기를 극복한 이시다 다이조, 1990년대 이후 경영을 책임진 오쿠다 히로시와 조 후지오가 간판 경영인이다. 최고경영자를 오너와 전문경영인이 절반씩 차지했다. “창업자 가문이라고 해서 최고경영자가 자동적으로 될 수 없다”는 이시다의 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장과 기술을 중시하는 풍토가 품질의 도요타를 만들었다. “현장에 답이 있다”는 현장 제일주의에 따라 가이젠(改善)과 적시공급방식이 탄생했고 이는 도요타 방식으로 자리매김했다. 딸기 품종 개량에도 가이젠을 도입해 ‘철 없는 딸기’ 생산에 성공한 사례는 가이젠이 사회 곳곳에 깊이 스며들었음을 잘 보여준다. 1인당 연간 자동차 생산 대수 93대는 라이벌 폭스바겐 57대를 압도한다. 매출 대비 급여 비율도 8%로, 한국 5대 자동차사 평균 12%보다 낮다.

글로벌 전략도 지속성장의 비결이다. 지난 60년간 미국에 220억달러를 투자했고 13만6000명을 고용하고 있다. 향후 5년간 100억달러를 추가 투입한다. 켄터키주 조지타운 공장에만 13억3000만달러를 투자할 예정이다. 캠리는 미국산 부품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가장 미국적인’ 일본차로 평가받고 있다.

미래에 대비한 혁신 드라이브도 주목할 가치가 있다. 7개의 소회사로 구성되는 컴퍼니 제도를 도입했다. 기술 중심에서 제품 중심으로 조직을 재설계한 것이다. 도요타 미래 설계 전략은 자동차 공동 부품을 레고 블록처럼 만들어 차를 완성해 가는 방식으로 설계 효율을 높이는 데 역점을 뒀다. 종전의 자력주의를 탈피해 타 회사와의 제휴에도 적극 나섰다. 경차를 만드는 다이하쓰를 자회사화하고, 스바루를 생산하는 후지중공업의 대주주가 됐다. 독점기술을 공유하고 공동 연구개발에 나서는 등 개방적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위기의식을 갖고 자기혁신을 위해 노력하는 자세야말로 도요타의 성공 비결이다.

박종구 < 초당대 총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