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신용카드 거래는 카드업자, 카드회원, 가맹점 등 세 당사자 사이에 이뤄지는 외상거래지만 궁극적으로는 카드업자가 채권자, 카드회원이 채무자가 되는 외상거래다. 이처럼 신용카드 거래는 세 당사자 간에 이뤄지는 외상거래이므로 두 당사자 간에서는 발생하지 않는 법적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예컨대 을이 A의 신용카드를 몰래 사용해 물품을 구입한 경우처럼 타인 명의의 신용카드를 무단사용한 경우 결국 카드사나 A가 손해를 보게 될 수 있다. 이런 사태를 초래한 을을 사기죄 등으로 처벌하는 것은 당연하다.

오영근 한양대 로스쿨 교수
오영근 한양대 로스쿨 교수
그런데 자기명의 신용카드를 사용한 후 카드회원이 대금을 변제하지 않을 경우 이것을 단순한 채무불이행의 문제로 볼 것인지 아니면 카드회원에게 형사책임까지 인정해야 할 것인지 문제된다. 카드회원이 처음부터 대금결제의 의사나 능력 없이 카드를 발급받아 사용한 경우 대법원은 신용카드를 발급받은 행위와 사용한 모든 행위에 대해 포괄적 사기죄를 인정한다(대법원 1996년 4월9일 선고, 95도2466 판결). 그러나 신용카드를 정상적으로 발급받아 사용하던 중 대금결제의 의사나 능력 없이 신용카드를 사용한 경우에도 사기죄를 인정해야 할 것인지 문제되는데, 대법원은 이를 긍정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변제 못한 자기명의 신용카드 사용

‘대법원 2005년 8월19일 선고, 2004도6859 판결’의 사실관계를 살펴보자. 갑은 1993년 S신용카드를 정상적으로 발급받아 사용했고, 1998년에는 그 카드를 갱신 발급받아 사용했다. 갑은 2000년 11월부터 2002년 12월26일까지 모두 109회에 걸쳐 이 신용카드로 총 7800여만원의 물품을 구입하거나 현금서비스를 받았다. 갑은 그중 5300여만원은 변제하고 나머지 2500여만원은 변제하지 못해 사기죄로 기소됐다.

[대한민국을 흔든 판결들] 카드 쓰고 못 갚으면 '사기'…"민사상 채무불이행으로 봐야"
제1심과 항소심은 갑이 2001년 12월부터 대금을 결제할 능력 없이 신용카드를 사용했다고 하더라도 사기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①갑이 신용카드를 가맹점에 제시하는 행위는 신용카드 회사가 갑에게 신용을 공여한 범위 내에서 자기 명의의 신용카드를 사용한 것에 불과하고 ②가맹점 측은 신용카드의 소지인과 명의인이 동일성을 갖는 한 그 지급능력의 유무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해관계를 갖고 있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은 “신용카드 사용으로 인한 신용카드업자의 금전채권을 발생케 하는 행위는 카드회원이 신용카드업자에 대해 대금을 성실히 변제할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므로 카드회원이 일시적인 자금궁색 등의 이유로 그 채무를 일시적으로 이행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아니라 이미 과다한 부채의 누적 등으로 신용카드 사용으로 인한 대출금채무를 변제할 의사나 능력이 없는 상황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용카드를 사용했다면 사기죄에 있어서 기망(欺罔·사람으로 하여금 착오를 일으키게 하는 것)행위 내지 편취(騙取·타인의 재물을 하자있는 의사에 기반하여 취득)의 범의를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갑은 신용카드업자가 가맹점을 통해 송부된 카드회원 서명의 매출전표를 받은 후 카드회원인 갑이 대금을 결제할 것으로 오신해 가맹점에 물품구입대금을 결제해 줌으로써 신용카드업자로부터 물품구입대금을 대출받고, 현금자동지급기를 통한 현금대출도 받아(현금자동지급기를 통한 현금대출은 그 지급이 사람이 아닌 기계에 의해서 이뤄지는 것에 불과하다) 신용카드업자로 하여금 같은 액수 상당의 피해를 입게 한 것”이라고 전제한 뒤, “이런 카드사용으로 인한 일련의 편취행위는 그것이 가맹점을 통한 물품구입행위든 현금자동지급기에 의한 인출행위든 모두가 피해자인 신용카드업자의 기망당한 금전대출에 터잡아 포괄적으로 이뤄지는 것”이라고 판시했다.

‘사람’을 기망해야 사기죄 성립

위 판결은 정상 발급된 자기명의의 신용카드를 대금결제의 능력 없이 사용한 경우 사기죄가 성립한다고 한 최초의 대법원판결이다. 이런 입장은 ‘대법원 2006년 3월24일 선고 2006도282 판결’을 거쳐 현재까지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사기죄가 성립하려면 ‘사람’을 기망하는 행위가 있어야 한다. 처음부터 대금결제 의사나 능력 없이 자기명의 신용카드를 발급받아 사용한 경우에는 발급단계에서 자연인인 카드회사 직원에 대한 기망행위를 인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상적으로 신용카드를 발급받은 후 대금결제 의사나 능력 없이 사용한 경우에는 발급단계에서 카드사에 대한 기망행위를 인정할 수는 없으므로 사용단계에서만 기망행위의 존재 여부를 검토해야 한다.

자기의 신용카드로 물품을 구입한 경우에는 가맹점주를 기망하였다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항소심이 밝힌 대로 가맹점주는 신용카드 명의자와 사용자가 동일한지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고, 사용자가 대금결제의 의사와 능력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 않고 알려고 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위 판결은 갑이 카드업자를 기망했다고 한다. 그런데 자기 신용카드로 거래를 한 경우 카드사의 컴퓨터를 기망했다고 할 수는 있어도 카드사의 직원을 기망했다고 할 수는 없다. 이 경우에도 사람을 기망했다고 하는 것은 형법이 ‘사람’을 기망한 사기죄와 ‘컴퓨터 등 정보처리장치’를 기망한 컴퓨터등사용사기죄를 엄격하게 구별하고 있는 취지에 반한다. 나아가 이 사건에서 갑이 대금결제 의사나 능력 없이 신용카드를 사용했는지도 의문이다. 갑은 10년 가까이 신용카드를 정상적으로 사용했고 7000여만원의 대금 중 5000여만원을 변제했기 때문이다. 결국 갑의 행위는 사기죄보다는 채무불이행이라고 할 수 있다.

‘민사의 형사화’ 현상 초래

그동안 대법원은 채무불이행에 대해 너무 쉽게 사기죄를 인정해 왔다. 오죽하면 채무불이행을 ‘결과적 사기범’이라고 지칭하는 용어마저 생겨났겠는가. 이 때문에 채권자들은 변제를 받지 못하면 일단 사기죄로 고소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고소율이 일본보다 수십 배 높은 것은 한국인의 성격 때문이 아니고, 대법원이 만들어낸 ‘민사의 형사화’ 현상 때문이다.

더 나아가 위 판결은 신용카드사에 대한 채무불이행에 대해서도 너무 쉽게 사기죄를 인정하고 있다. 신용카드업은 고리대금업이다. 신용카드사용 수수료가 1%라면 카드사가 받는 대출이자는 대체로 연 10%가 넘고, 연체이자는 연 20%가 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고수익을 올리는 신용카드사는 ‘고수익 고위험’ 원칙에 따라 스스로 위험을 관리해야 한다. 그러나 위 판결은 ‘고수익은 카드사가, 고위험은 카드회원과 형사사법기관이’라는 적절치 않은 관행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과거 외환위기 사태 직후처럼 카드사가 위험관리를 하지 않고 대학생이나 청년들에게 카드를 마구 발급했을 때에는 발급단계에서도 카드회원들에게 기망을 당했다고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법원은 대금을 납부하지 못하는 카드회원들에게 사기죄를 인정했고, 청년들이 신용불량자에서 나아가 전과자로 전락하게 만들었다.

위 판결은 카드대금을 납부하지 못한 사람에게 너무 쉽게 사기죄를 인정함으로써 형사사법기관을 고리대금업자인 신용카드사의 수금기관으로 전락시킨 판결이라고 할 수 있다.

빨리 변제받기 위해…카드社, 형사 소송 남발

금전대차나 외상거래는 민사상의 채권채무 관계다. 채권자는 담보나 채무자의 신용을 보고 이런 거래를 한다. 채무불이행의 경우에도 채무자를 형사처벌할 수는 없다. 고리대금업자는 담보나 신용확인 없이 돈을 빌려주기도 하는데 이는 고위험을 업자가 감수할 정도로 고수익이 생기기 때문이다. 신용카드거래는 카드회사가 채권자, 카드회원이 채무자인 고리의 금전대차관계다. 신용카드는 신용있는 사람에게만 발급해야 하고, 카드사는 고수익을 얻는 만큼 스스로 카드회원의 카드사용에 따른 위험도 감수해야 한다.

정상적으로 발급받은 신용카드를 사용하다가 대금을 납부하지 못한 경우라면 민사상 채무불이행에 불과하다고 해야 한다. 이 경우 카드사는 민사소송을 통해 카드회원의 재산에 대한 강제집행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번거로우므로 카드사는 카드회원을 사기죄로 고소해 형사처벌(10년 이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 벌금)의 위협을 통해 빨리 변제를 받으려고 하는 것이다.

오영근 < 한양대 로스쿨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