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중공업그룹이 이달 말 기준으로 총 52척(29억달러 상당)의 신조 선박을 수주한 것은 지난 몇 년간 10조원이 넘는 적자를 내며 빈사지경을 헤매온 한국 조선업계에 ‘가뭄 속의 단비’와 같은 소식이다. 이 그룹의 지난해 수주액은 59억달러(64척)로 최고 호황기였던 2007년 실적(295억달러, 336척)의 5분의 1 수준이었다. 이 때문에 올해 수주목표액을 120억달러로 책정했을 때만 해도 업계 안팎에선 반신반의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하지만 26일 대규모 수주 발표로 그동안 업계를 짓눌러온 ‘패배주의’를 걷어낼 수 있는 발판을 모색할 수 있게 됐다. 경쟁사인 삼성중공업 대우조선해양도 이를 반기는 분위기다. 글로벌 조선업 경기가 바닥을 치고 상승하면 그 수혜를 함께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업 살아나나] "선박 가격 쌀 때 미리 확보하자"…해외 선사들 발주문의 잇따라
■ 바닥친 것 맞나? 1분기 글로벌 선박 발주량 37% 급증

전문가들의 중론은 ‘조선 경기가 바닥권을 탈출해 회복국면에 접어들기 시작했다’로 요약된다.

이 같은 조짐은 지표상으로도 확인된다. 미국 경기가 호조를 보이고 있는 가운데 올 들어 유럽까지 완연한 회복세를 띠면서 세계 교역량이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세계 교역량 증가율은 2015년 2.7%에서 작년 2.2%로 떨어졌다가 올해 3.8%(전망치)로 높아졌다.

영국 조선·해운 분석기관 클락슨에 따르면 올 1분기 세계 선박 발주량은 전년 동기보다 36.5%나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발주물량의 절반은 유조선과 LNG선이었다. 모두 국내 ‘빅3(현대중공업·삼성중공업·대우조선해양)’가 강점을 갖고 있는 선종이다.

동남아시아에 정유공장이 늘고 있고 브라질의 원유 수출이 증가하면서 세계적으로 유조선 수요가 늘어나고 있다. 또 미국에 ‘셰일가스 생산 붐’이 다시 일면서 셰일가스 수출이 증가했고 호주에서 해저가스전 개발 등이 활발해지면서 LNG선 발주도 늘었다. 세계에서 개발 중인 대부분의 가스전이 2020년부터 생산에 들어가고, 선박에 대한 환경규제까지 본격 시행을 앞두고 있어 친환경 연료인 LNG 운송은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LNG선 건조에 많은 경험을 축적한 삼성중공업 관계자는 “최근 유조선과 LNG선 발주가 조금씩 늘어나는 것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며 “예전만큼의 전성기는 오지 않겠지만 분위기가 좋아지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고 말했다.

작년부터 유가가 회복 조짐을 보이면서 해양플랜트 역시 최악의 상황을 넘겼다는 평가다. 클락슨은 부유식 원유생산·저장·하역설비(FPSO)나 액화설비(FLNG), 저장·재기화설비(FSRU) 등 생산 설비를 중심으로 해양플랜트가 회복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선박의 경우 초대형유조선(VLCC), 벌크선, 가스선 위주로 발주가 늘어날 것이란 전망이다.

■ 왜 반등? (1) 세계경기 회복 (2) 유조선 등 발주 증가 (3) 노후선 교체

이에 따라 향후 조선·해운 호황기에 대비해 지금처럼 가격이 쌀 때 선박을 확보하려는 선취매 수요도 눈에 띄게 늘고 있다.

현재 VLCC 가격은 약 8000만달러로 14년 만에 최저 수준이다. 2008년 가격(1억6000만달러)에 비해 절반 수준으로 떨어진 것이다. 철강업체들이 후판 공급가격을 올리겠다고 압박하는 것도 선주들의 발주를 부채질하고 있다. 선박 제작 비용의 15%를 차지하는 후판은 철광석, 연료탄 등을 주원료로 생산하고 있는데, 이들 원자재 가격이 작년부터 급등세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환경규제 강화에 따른 노후선박 해체와 업계 구조조정 등으로 선박 공급과잉이 조금씩 해소되고 있는 것도 긍정적인 신호다. 특히 국제해사기구(IMO)가 선박 연료에 들어가는 황산화물(Sox) 함유량을 3.5%에서 0.5%로 낮추는 환경 규제를 2020년부터 시행키로 한 것이 신조 발주를 늘리는 요인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지난 수년간 지속돼온 중국 조선소들의 구조조정은 한국 조선업계에 실질적인 수혜로 다가온다. 중국 국영 조선소 그룹인 중국선박중공(CSIC)과 중국선박공업(CSSC)은 올해 경영합리화를 위한 합병을 앞두고 있다. CSIC는 앞서 지난해 5월 6개 조선소를 3개로 통폐합했다. 또 지난해 말 중국원양해운(COSCO)과 중국해운집단(CSG)이 산하 조선소 13곳을 합친 데 이어 최근엔 선전 지역의 대표적 해양 플랜트 조선소인 자오상쥐국제유한공사(CMHI)와 중국 국제 해운 컨테이너그룹(CIMC)의 통합도 진행 중이다.

■ 본격 회복 언제? 선박 가동률 80% 넘어야…이르면 올해 말

다만 조선업 경기의 완전한 회복을 기대하는 것은 아직 무리라는 주장도 만만찮다. 무엇보다도 선박 공급과잉이 해소되지 않고 있어서다. 글로벌 투자은행(IB)인 UBS에 따르면 세계 선박 가운데 실제 바다를 운항하는 비율은 70% 수준에 불과하다. 나머지 30%는 수송 일감이 없어 항만이나 도크에 묶여 있다는 얘기다. 지난 3년간(2014~2016년) 선박 공급 증가율(전년 대비)이 3~5%로 수요증가율(1~3%)을 앞선 점도 다소 부담이다. 대우조선해양 관계자는 “글로벌 경기 호조가 앞으로 1년 이상 더 지속돼 선박가동률이 최소 80% 선까지 올라야 조선업 경기가 상승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많은 전문가는 본격적인 업황 반등시점을 올해 말 또는 내년 초로 예상하고 있다.

안대규/박재원 기자 powerzani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