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워커 장군과 워커 전투화·워커힐호텔…
서울 지하철 1호선 도봉역 건너 길가에 조그마한 표석이 있다. 6·25 발발 6개월 뒤인 1950년 12월23일 전사한 주한 미 8군사령관 월턴 워커 장군 추모비다. 낙동강 전선을 사수해 대한민국을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구한 그가 세상을 떠난지 59년 만인 2009년 한 노병이 사재를 털어 세운 것이다.

그가 없었다면 전쟁의 흐름을 반전시킨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도 불가능했다. ‘워커 라인’으로 불리는 낙동강 전선을 지킨 덕분에 북진의 계기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는 “부산으로 밀리면 대살육이 일어난다. 오직 사수하느냐 죽느냐(stand or die)의 선택밖에 없다”며 장병들을 독려했다. 자신의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한국 육군본부가 부산으로 내려간 상황에서도 미 8군사령부를 대구에서 후퇴시키지 않았다

그는 늘 헬멧을 쓰고 야전 현장을 뛰어다녔다. 그해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중공군 방어에 정신이 없던 미 24사단과 영연방 27여단을 방문하러 지프를 타고 가던 그는 반대편에서 오던 한국군 트럭에 부딪혀 유명을 달리했다. 24사단 중대장이던 외아들 샘 워커 대위가 은성무공훈장을 받게 되자 부대를 찾아가 직접 달아 줄 계획이었기에 안타까움은 더 컸다. 아들 샘은 아버지의 시신을 미국으로 운구하라는 지시를 거부하며 끝까지 적과 싸우겠다고 고집하다 맥아더의 ‘명령’을 듣고서야 운구에 나섰다.

백선엽 장군은 훗날 “전장의 불길을 제압하는 최고 소방수였던 워커 장군은 지뢰 폭발에 대비해 지프에 항상 모래 자루를 깔고 다녔는데,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던 그의 지프가 지뢰 아닌 충돌 사고로 주인을 보낼 줄이야…”라며 애통해했다. 워커의 흔적은 지금도 곳곳에 남아 있다. 재래식 군화의 안전성을 높이기 위해 앞부분을 강화한 전투화 이름이 그에게서 유래했다. 1963년 지은 워커힐호텔도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1987년 이곳에서 진행된 추모비 제막식에는 아들 샘 예비역 육군대장이 참석했다.

2009년에는 주한 미 8군사령부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그저께 그 동상의 이전 기념식이 열렸다. 새로 조성된 평택 미군기지로 옮겨가는 행사였다. 이 자리에서 밴덜 미 8군사령관은 “장군의 동상은 옮겨가지만 한·미동맹을 상징하는 ‘Go together(같이 갑시다)’ 정신은 강력하게 유지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 시각 도봉동 길섶의 추모비를 찾는 사람은 없었다. 어른 허리만 한 높이의 표지석에 빛 바랜 플라스틱 조화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행인들도 무심히 지나기만 했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