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경제외교 전략의 큰 그림
달러의 금태환과 고정환율제를 근간으로 하는 브레턴우즈 체제는 1971년 8월 닉슨 대통령의 금태환 정지 선언으로 붕괴했다고 평가된다. 하지만 고정환율제가 변동환율제로 바뀌면서 달러 중심 체제는 사실상 그대로 유지됐다. 다른 몇몇 통화들이 달러에 대해 보조적 결제수단으로 등장했을 뿐이다. 최근에 와서는 브레턴우즈 체제가 붕괴한 것이 아니라 1.0 버전에서 2.0 버전으로 바뀌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일부에서는 중국 위안화가 달러와 함께 중요한 국제결제통화로 사용되는 상황을 가정하고 이를 성급하게 브레턴우즈 3.0 체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브레턴우즈 체제하에서 우리나라 같은 비(非)기축통화국은 여러 가지로 힘들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해외자본 유출 문제다. 자본이동이 자유화된 상황에서 해외자본이 대량으로 유출될 경우 재앙에 가까운 상황이 발생한다. 해외자본이 우리 주식이나 채권을 팔아 원화를 챙기고 이를 달러로 한꺼번에 바꿔서 나가는 경우 엄청난 달러 수요가 발생한다. 우리 경제 내에 이를 해결해줄 달러 유동성이 모자라는 경우 외환위기를 당하는 것이다. 경제위기 국면에 외환위기까지 겹치면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치는 설상가상의 상황이 발생한다. 기축통화 발행이 가능한 나라야 통화를 여유 있게 발행해서 지급하면 되지만 이런 사치(?)는 우리에게 허용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1997년에 이런 위기를 경험한 바 있다. 우리는 그저 열심히 수출해서 경상수지 흑자를 통해 달러를 ‘벌고’ 외환보유액으로 ‘쌓아야’ 한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에도 2700억달러에 달하는 외환보유액, 그리고 미국 정부가 제공한 300억달러의 통화스와프 협정 덕분에 최악의 상황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런데 새로 취임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런 상황에 무심한 듯하다. 그는 심지어 다른 나라들이 미국에 대해 흑자를 내면서 달러를 버는 행위를 미국의 일자리를 훔치고 미국을 이용해 일방적으로 이익을 보는 행위, 즉 미국에 해악을 끼치는 행위로 간주한다. 그가 국가무역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한 피터 나바로 교수는 《중국에 의한 죽음》이라는 저서에서 중국이 미국에 대해 흑자를 내면서 그 돈으로 군비를 확장해 궁극적으로 미국을 죽이려 들 것이라는 주장까지 하고 있다. 최근에 미국을 방문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아베 신조 일본 총리를 보면 답이 나온다. 이들 국가의 대미흑자 규모는 중국 3656억달러, 독일 741억달러, 일본 686억달러로서 나란히 1, 2, 3위를 기록했다. 그러고 보면 283억달러의 대미흑자를 기록한 우리나라 지도자도 반드시 미국을 방문했어야만 했다.

브레턴우즈 체제하에서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미국이 적자를 낸 만큼 달러가 전 세계 경제로 공급된다. 우리나라가 중동에서 원유를 수입하려고 해도 달러유동성이 필요하다. 국제결제통화인 달러는 세계경제 성장에 발맞춰 충분히 공급돼야 하는데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는 달러의 공급채널 역할을 한다. 미국은 1944년에 이미 이 체제를 출범시켰다. 달러 유동성이 부족한 나라는 큰일 당할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런데 미국 대통령이 대미 흑자를 통해 달러를 버는 행위를 미국에 해를 끼치는 행위로 인식하면서 흑자를 줄이라고 요구하는 것을 보면 속이 답답해진다.

우리 지도자가 빨리 미국에 가야 할 이유가 추가되고 있다. 얼굴을 마주하고 기축통화국이 아닌 나라의 설움을 생생하게 전달해야 한다. 나아가 미국의 대미흑자 축소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 등 불리한 요구를 수용하는 대신 화끈한(?) 수준의 통화스와프 협정을 요구하고 이를 성사시켜야 한다. 위기 시에 미국이 달러 유동성 지원을 하겠다는 약속을 미리 받으면 큰 시름 하나를 덜 수 있다.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아차 하면 큰 것을 잃을 수도 있는 현 상황에서 미국의 지도자와 제대로 소통하면서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는 경제외교 전략의 큰 그림, 그리고 이를 실행할 수 있는 지도자가 절실한 시점이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교수·공적자금관리위 민간위원장 chyun3344@daum.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