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과장&이대리] "그 후보는 절대 안돼"…상사 눈치 보느라 화장실서도 입조심
‘정치의 계절’이 돌아왔다. 다음달 9일로 예정된 19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온 나라의 관심이 정치에 쏠려 있다. 사적인 이야기로 시작된 김과장 이대리들의 점심시간 토론 주제는 어느새 대선 후보 검증으로 끝나곤 한다. 이 과정에서 스트레스받는 직장인도 적지 않다. 특정 후보를 지지하다 ‘왕따’가 된 사연부터 특정 후보 지지를 은근히 강요하는 직장 상사까지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지키기가 어려운 환경이어서다. 자신의 주장만이 옳고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이분법적 사고로 사내 갈등의 골도 깊어지고 있다. 대선을 앞두고 내적 갈등에 빠진 김과장 이대리들의 사연을 들여다봤다.

‘동기 카톡방’ 두 개 된 사연

작은 무역회사에 다니는 정 대리(29)는 동기 카톡방(카카오톡 대화방)이 두 개다. 입사 동기인 김 대리를 뺀 나머지 동기들끼리 방을 따로 만들었다. A후보 열성적 지지자인 김 대리가 동기 카톡방을 A후보 ‘선전장’으로 이용했기 때문이다.

김 대리는 다른 후보의 ‘가짜 뉴스’를 검증 없이 채팅방에 올리기 일쑤였다. 지역 비하도 서슴지 않았다. 최근 발표된 여론조사 결과에서 A후보 지지율이 특정 지역에서 유독 낮게 나오자 “역시 △△지역은 적폐의 본산”이라며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었다. 그 지역 출신인 정 대리는 “나를 겨냥해 하는 말인 것 같아 기분이 무척 나빴다”고 말했다. 극성 지지자인 동기 때문에 A후보를 선택하려던 마음도 접었다. “김 대리에게 ‘정치병 환자’라고 쏘아붙이고 싶지만, 그렇게 하면 영원히 화해하지 못할 것 같아 참았어요. 대신 그 친구를 빼고 별도의 동기방을 개설했습니다. 알고 보니 다른 동기들도 스트레스를 받고 있더라고요.”

게임업체에 근무하는 박 대리는 자신의 보수적 정치 성향 때문에 사내에서 왕따 당하는 것 같아 괴롭다. 지난 대선 때 박근혜 후보를 찍었다는 사실을 밝힌 게 화근이 됐다. 정치 토론이 이어질 때마다 그의 정치 성향을 비아냥거리는 직원들이 생겼다. “주말인데 태극기 집회에 안 나가고 출근했네?”라고 하는가 하면 “이번에는 ‘홍트럼프’를 찍어야지?”라고 농담을 건네기도 한다. 박 대리는 “나는 보수의 가치를 지키려 했을 뿐인데, 박근혜 전 대통령을 뽑았다는 이유로 놀림거리가 되는 것 같아 슬프다”고 푸념했다. 그는 이번에도 ‘보수 적통 후보’를 자처하는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를 찍을 생각이다. 하지만 동료들에게는 이를 말하지 않기로 했다.

‘답정너’ 상사에 스트레스

한 전자회사에 근무하는 강 과장(36)은 요즘 화장실에 가기 전에 팀장이 자리에 있는지 먼저 살핀다. 화장실에서 팀장과 마주쳤다가 소변기 앞에서 ‘정치 설교’를 들을까 봐서다. 강씨의 팀장은 대구 출신에 성장과 안보를 최고 가치로 꼽는 인물이다. 회의 중에도 “북한을 주적이라고 말하지 못 하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는 사람이 제 정신이겠느냐”며 “B후보는 절대 안 된다”고 해 직원들을 당황하게 했다.

강 과장은 결국 팀장과의 대화를 포기했다. 올해가 과장 승진 첫해라 팀장과 업무적으로는 물론 사적으로도 가까워지고 싶었던 그다. 하지만 괜히 정치적 견해를 달리했다가 사이만 나빠질 것 같아 아예 거리를 두기로 했다.

중견 건설사에서 부서 막내로 근무하는 박 대리(30)는 최근 같은 부서 김 차장과의 저녁 자리에서 곤욕을 치렀다. 박 대리가 지지하는 후보의 정책에 ‘건설시장 규제 강화’가 있어서다. 김 차장은 박 대리에게 “‘건설맨’이 맞나. 업계 상황에 도무지 관심이 없는 것 같다”고 타박했다.

김 차장은 재건축 규제 완화를 약속한 후보를 지지한다고 했다. 며칠 뒤 김 차장은 부하 직원이 모인 자리에서 “회사와 국가의 미래에 도움이 되는 결정을 하길 바란다”며 은근히 압박했다. 박 대리는 “대선은 ‘애사심 테스트’가 아닌데 지지 후보까지 회사 입장을 생각해 맞춰야 한다니 답답하다”고 털어놨다.

대선 결과 내기에 울고 웃고

금융권에 근무하는 박 대리(33)는 대선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 특정 후보를 지지해서가 아니다. 직장 동료들과 대선 결과를 놓고 내기를 했기 때문이다. 부장을 포함해 부서원 12명이 3만원씩을 냈다. 크게 세 명의 후보로 압축됐고, 당선된 후보를 찍은 직원들끼리 모인 돈을 나눠 갖기로 했다.

이런 상황이 박 대리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박 대리는 “평소 내기 같은 걸 좋아하지 않는데 부서 분위기에 휩쓸려 반강제적으로 참가했다”며 “C후보를 뽑은 것도 지지 후보가 한쪽으로 쏠리면 안 된다고 부장이 핀잔을 주는 바람에 눈치를 봐서 결정한 것”이라고 토로했다.

반면 이런 내기를 즐기는 경우도 있다. 공기업에 다니는 김모씨(30)는 요즘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대선 관련 신문기사부터 읽는다. 부서원들과 대선 결과 내기를 한 뒤로는 출근 인사가 “D후보 뜰 것 같다” “역시 E후보가 TV 토론에 강하다”는 식이어서다. 김씨는 “공통 화제가 생기니까 대화도 더 자연스럽게 많이 하게 된다”며 “함께 내기 결과를 예상하면서 농담을 주고받는 등 부서 분위기가 살아났다”고 말했다.

‘정치 얘기 금지’ 선언한 곳도

직원들 간에 갈등의 골이 깊어지자 정치 관련 이야기를 아예 금지한 경우도 있다. 한 전자장비업체는 지난달부터 사내에서 정치 이야기를 막아버렸다. 대선을 앞두고 정치에 대한 직원들의 과도한 관심이 팀워크를 해치고 사내 분란을 조장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에서다.

적극적으로 특정 후보를 홍보하는 직원들이 다른 후보를 비판하는 일이 빈발하면서 직원들 간 이견이 감정 대립으로 치닫는 경우도 많다. 회사 관계자는 “회식이나 식사 자리에서 우연히 대선 후보와 관련한 토론을 할 수는 있지만 업무 공간에서는 원칙적으로 하지 않는다”며 “직원들도 이런 조치의 필요성에 대부분 공감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선 경찰서에서도 정치 얘기는 금물이다. 공무원은 정치적 중립 의무가 있어 지지하는 후보가 있더라도 입 밖에 꺼내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총경·서장급 간부 이하 직원들 사이에선 ‘누가 어느 라인이라더라’는 얘기는 돌지만, 회식이나 편한 자리라고 섣불리 정치얘기를 꺼냈다가는 분위기만 나빠진다. 서울의 한 경찰서 팀장(경감)은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될 때도 젊은 직원 몇몇이 방송을 보며 박수를 쳤더니 선임 직원 하나가 ‘그만하라’고 화를 낸 적이 있다”며 “그후 사무실에선 대선이나 정치 얘기는 아예 꺼내지 않는다”고 말했다.

고재연/정지은/이수빈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