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부활절 단상-예수, 윤동주 그리고 5월9일
지난 일요일(4월16일)은 내게 특별한 부활절이었다. 어머니 건강이 기적처럼 회복돼 부활의 참 기쁨을 제대로 느낀 날이었다. 그래서 가족 예배가 너무도 가슴 벅찬 날이었다.

그날 나는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다시 음미하기 위해 성서 가운데 복음서를 읽어봤다.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려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고통이 극점에 다다랐을 때 너무나 인간적인 절망을 토로한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를 외치면서 말이다. 그러면서도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고 주의 뜻대로 하소서”라며 고통을 받아들인다. 마침내 고통이 최고점에 이른 순간 예수는 “다 이루었다”고 외치며 운명한다.

그렇다. 예수는 절망과 고통을 피하고 싶은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결국엔 십자가를 지고 고통을 온몸으로 감당했다. 그 고통은 인류 구원을 위해 약속된 고통이었다. 이를 위해 고통을 끝까지 감내해낸 것이다. 고통의 시간이 없었다면 인류 구원이라는 행복에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윤동주의 시 ‘십자가’를 생각해본다. 윤동주가 이 시에서 왜 “괴로웠던 사나이/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십자가가 허락된다면”이라고 표현했는지 알 수 있었다. 상식적 고통은 단지 고통일 뿐이고 한없는 절망이다. 하지만 예수는 고통의 최댓값을 넘어서는 순간 인류 구원이라는 이상과 무한한 행복이 펼쳐지는 환희를 맛본 것이다.

예수는 정말 괴롭고 고통스러웠기에 행복했다는 사실을 윤동주는 정확히 이해했다. 윤동주는 일제 강점기라는 절망적 상황(많은 지식인이 변절하고 지조를 버리던)에서도 역설적으로 조국의 독립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를 시로 노래하고 자신의 삶으로 살아내지 않았을까라는 상상을 해본다. 예수도 윤동주도 인류사에서 영원히 부활했다.

2014년 4월16일은 차디찬 바다에, 고통의 심연에 세월호가 빠진 날이다. 그로부터 3년간 우리 사회는 갈등과 절망의 터널을 지나왔다. 온 국민이 십자가 형벌만큼, 아니 그 이상의 절망과 고통을 살아냈다. 이제 그 극점을 넘어서고 있다. 우리 국민은 예수처럼 인간적인 토로도 했다. 좌우로 나뉘어 분열과 상처의 극점도 넘어서고 있다. 나는 이 고통과 분열과 갈등이 오는 5월9일, 예수처럼 윤동주처럼 행복한 대한민국으로 부활하기를 소망해본다. 올해 부활절이 내게 너무나 특별한 부활절이 되기를 바라는 또 하나의 소망이다.

손주은 < 메가스터디그룹 회장 son@megastudy.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