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영 칼럼] '상상력의 정치' 한국선 기대 못하나
“쌀밥이 인간을 무자비하고 흉악하게 만든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확인됐다. 범죄학 연구자들이 유죄가 확정된 전국의 파렴치범과 흉악범들을 전수 조사한 결과, 죄를 저지르기 48시간 이내에 최소 한 끼 이상은 쌀밥을 먹은 것으로 드러났다.”

놀라셨다면 미안하다. ‘가짜뉴스’다. 통계 오독(誤讀)을 풍자해본 얘기다. 어쨌든 그럴듯하지 않은가. “범죄자들이 쌀밥을 먹고 죄를 저지른 건 명백한 사실 아니냐”며 ‘쌀밥 금지령’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오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유감스럽게도 요즘 한국에서는 ‘쌀밥=유해식품’ 식의 규제법령이 넘쳐난다. 각종 불균형과 청년실업 등 현안에 대한 정치권의 진단과 처방 대부분이 그렇다. 전통시장과 골목상권을 보호한다며 대형마트들에 월 2회 의무휴업을 강제한 제도가 대표적이다. 이 제도를 시행한 지 5년이 넘었지만, 골목상권이 재미를 봤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소비자들의 쇼핑패턴 변화를 간과한 ‘오발탄’이 효과를 낼 리 만무하다.

청년 일자리 대책들도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공무원을 늘리고, 기업들에 일정비율 이상의 신입사원 채용을 강제하는 ‘청년고용할당제’를 실시하겠다는 식이다. “역대 최대 수준인 기업들의 사내유보금을 풀면 일자리를 얼마든지 늘릴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일자리 부족 원인이 ‘마음만 먹으면 더 채용할 수 있는 기업들이 딴청을 부리고 있기 때문’이라는 진단을 전제하고 있다.

비정규직 해법도 ‘단순명쾌’하다. 파견직 등의 허용 범위를 최소화하고, 계약직을 정규직으로 돌리도록 기업들을 압박하면 해결할 수 있단다. 기업이 아무리 어려워도 저성과자들조차 제대로 내보낼 수 없는 세계 최악 수준의 고용경직성이 정규직 신규 채용을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에는 눈감아 버린다.

보이는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정치인들의 오진(誤診)과 엉터리 처방을 더는 두고 볼 수 없다. 며칠 전 한국노동경제학회가 주최한 ‘청년 일자리 정책’ 토론회에서 학자들이 “주요 대선후보들과 정치권의 일자리 정책은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킬 게 뻔하다”며 “상상력 고갈 수준의 레퍼토리만 되풀이하고 있다”고 신랄하게 비판할 만했다.

‘야-야(野野) 대결’로 흘러가고 있는 대선 레이스가 1992년 미국 대선을 떠올리게 한다. 진보성향 빌 클린턴 민주당 후보는 8%로 치솟은 실업률 해법으로 ‘800만개 일자리(EMJ: Eight Million Job) 창출’을 공약 1호로 내걸었다. 민주당의 전통적인 ‘큰 정부’로는 해결할 수 없는 과제였다. 경쟁 보수정당인 공화당의 정책에 눈을 돌렸다. ‘규제완화’와 ‘공공부문 축소’를 일자리 확대의 두 축(軸)으로 수용했다. 로널드 레이건과 조지 부시가 이끈 공화당이 12년 동안 백악관을 차지하고 있던 때였다. 클린턴은 유권자들의 정권교체 심리 덕분에 대통령에 당선되긴 했지만, 민주당 노선으로는 일자리를 제대로 창출하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클린턴 리퍼블리컨(클린턴을 지지한 공화당원)’들의 지지에 힘입은 클린턴은 당선되자마자 기업인과의 스킨십을 늘리는 일부터 시작했다. 틈날 때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GE의 잭 웰치, IBM의 루이스 거스너, 씨티그룹의 샌포드 웨일 등 기업 총수들을 불러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언론이 명명(命名)한 ‘FOB(Friends of Bill’s·빌 클린턴의 친구들)’는 그렇게 생겨났다. 앨 고어 부통령을 단장으로 한 ‘정보 고속도로(Information Super-highway) 추진단’을 출범시킨 건 그 결실이었다. 인터넷망 등 IT 인프라를 확충해 아마존 구글 페이스북 등 실리콘밸리 벤처 기업들이 줄줄이 태어날 수 있도록 하는 터전을 닦았다.

시대 상황에 기민하게 대응한 클린턴의 ‘정치 상상력’은 영국 노동당, 독일 사민당 등 유럽의 진보정당들로 하여금 시장경제노선을 과감하게 수용토록 하는 ‘제3의 길’로 이어졌다. ‘상상력과 결단의 정치’에 무릎을 쳤던 기억이 새롭다.

이학영 논설실장 ha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