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몽펠르랭학회의 자유주의에 길을 묻다
자유주의자들에게 4월은 뜻깊다. 사회주의와의 이념전쟁에서 패해 오랫동안 자취를 감췄던 자유주의가 몽펠르랭학회(MPS) 창립과 더불어 부활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경제적 자유를 말하면 ‘퇴폐적인 사람’이라고 낙인찍던 시기에 인류가 노예의 길로 가고 있다고 경고하면서 등장한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주도로 1947년 부활절에 스위스 제네바 근처 아담한 마을 몽펠르랭에서 설립된 학회는 올해 70주년을 맞는다. 하이에크를 비롯 미제스, 프리드먼, 뷰캐넌, 오이켄 등 세상을 바꾸는 데 성공했던 유명한 몽펠르랭학회 회원들의 정신에서 나온 게 현대의 자유주의다. 이에 주목하는 이유는 한국사회의 참담한 현실 때문이다.

요즘 경제적 자유를 말하는 사람은 이른바 적폐 대상이다. 좌파의 눈치를 보면서 자유를 말해야 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MPS의 자유주의에 길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우선 학회창립 때부터 뜨거웠던 이슈가 있다. 20세기 전반 이후 자유주의가 왜 패배했는가, 자본주의는 위기 착취 빈곤 등 온갖 부조리의 원인이라는 좌파의 비판처럼 자유주의 자체의 내재적 결함 때문인가의 문제였다.

회원들의 논쟁 끝에 자유주의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념전쟁에서 패한 이유는 좌파가 자본주의에 대한 ‘가짜 뉴스’를 만들어 특유의 예술적 기교로 시민들을 선동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하이에크의 통렬한 비판이다. 사실보다는 자신의 이념에 맞춰 해석된 좌파의 역사 이해에 현혹되지 말라는 충고도 한다. 좌파가 자본주의 탓이라고 지적한 부조리는 실제로는 규제와 간섭 때문이라고 회원들은 강조했다.

각별히 물어야 할 건 MPS의 독특한 세 가지 자유주의 비전이다. 첫째, 경제적 자유야말로 번영의 열쇠요 언론·사상·종교 등 시민적 자유의 보루(堡壘)이고 민주 발전의 선결조건이라는 탁월한 논리로 경제적 자유를 여타의 자유보다 높은 가치로 승격시켰다. 둘째, 비경제 부문에만 적용하던 법치를 경제에 끌어들인 몽펠르랭 석학들의 공로도 탁월하다. 기업과 개인을 규모나 부에 따라 차별하거나 정치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취급하는 법을 집행해서는 안 된다는 보편성을 의미하는 법치는 경제적 자유의 수호자다. 경제적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 정부의 권력행사는 제한돼야 한다는 국가권력제한론도 몽펠르랭 자유주의의 마지막 세 번째 비전이다. 국가권력제한론의 바탕에는 시장이야말로 정부보다 도덕적이고 현명하기 때문에 시장 앞에서 통치자는 도덕적으로나 지적으로 건방 떨지 말라는 준엄한 경고가 깔려있다. 이쯤에서만 보아도 경제적 자유주의를 사회철학으로 승격시킨 MPS의 탁월한 공로는 결코 작지 않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 사회는 시민적 자유만큼 경제적 자유를 존중하지 않는다. 경제적 자유보다 민주주의를 더 귀하게 여기는 게 좌파다. 시장경제는 늘 규제 대상이다. 규제가 많을수록 기업들은 정부 정책을 비판하기 어렵다. 세무사찰, 인허가 배제 등 정부의 불리한 처분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언론자유가 불안정한 이유다.

우리 사회의 법치 인식도 취약하다. 강자로 분류되는 대기업에 대해서는 규제일변도이고 약자에 속하는 중소상공인과 농수산업은 보호, 시혜 일변도의 입법이 쏟아진다. 누진세, 조세감면, 특별소비세, 복지, 재분배 등 법치에 어긋나는 차별법이 경제의 바탕에 두텁고 즐비하게 깔려 있다. 차별, 특혜, 소급입법의 반(反)법치로 얼룩진 민주화보상법 같은 각종 특별·특검법 등 특별입법도 첩첩이 쌓여있다.

법치 위반은 입법의 정치화요 불의(不義)이고 인권과 개인의 존엄성 유린이다. 기다리는 건 정치와 맺는 연줄로 먹고사는 정실주의, 부정부패, 사회적 갈등이다. 통치권력의 제한도 부실하다. 입법부는 고삐 풀린 망아지격이다. 멋대로 법을 찍어낸다. 입법권을 제한할 적절한 장치도 없다. 정치질서가 포퓰리즘, 시혜적 복지, 기업 때리기 등 좌파의 경연장이 되는 이유다. 지금이야말로 한국 경제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자유, 평화, 번영을 위해 MPS의 자유주의 비전을 새겨들을 때다.

민경국 < 강원대 명예교수·경제학 kwumin@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