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국민연금, 그 절대반지의 유혹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과 구속에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 개입했다는 사유도 포함됐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뇌물죄를 뒤집어쓴 것도 같다. 전 복지부 장관인 문형표 씨는 산하 국민연금으로 하여금 이 두 기업의 합병에 찬성표를 던지도록 지시했다는 죄목으로 구속돼 재판을 받는 중이다. 과연 이 죄목은 대통령을 탄핵하고 장관과 삼성그룹 총수를 구속할 만한, 적절한 사유였을까. 헌법재판소는 ‘대통령 파면’을 통해 앞으로 다시는 권력의 경영 개입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요지의 결정문을 발표했다. 헌재의 이 결정은 위하력, 다시 말해 그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경계하는 힘이 있기나 한 것일까.

지금 정부는 경영난에 빠진 대우조선해양을 구하기 위해 시중은행들과 국민연금에 부적절한 손실 분담을 요구하고 있다. 지난달 30일에도 산업은행은 국민연금이 대우조선 채무 조정에 적극 나서줄 것을 재촉하는 실로 어색한 미팅을 했다고 한다. 서로 어색하고 짜증스러웠을 것이다. 정부가 밑그림을 그린 대우조선 지원 방안에 국민연금이 저항하고 있다는 사실은 연금 측의 발표를 보면 명백하다. 연금은 △분식회계와 관련한 대우조선의 입장 △출자전환 및 채무 재조정의 정당성·당위성·형평성·실효성과 관련한 제반 자료를 요청했다고 밝히고 있다. 도저히 산업은행의 요구를 받아줄 수 없다는 점을 완곡하게, 그러나 구체적 항목을 거론하는 방식으로 누누이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이들 자료는 나중에 검찰에 제출될 것이다. 국민연금은 이미 막대한 손실을 입은 상태다. 소송도 불가피할 것이다. 지금도 만기가 남은 대우조선 회사채 1조3500억원어치의 29%인 3900억원어치를 보유하고 있다. 이 회사채의 50%를 출자전환하고, 잔여 50%는 만기를 연장해주라는 것이 정부의 요구다. 국민연금은 탄핵 과정에서 몇 차례 압수수색을 받았고 기어이 관계자들이 일제히 기소되는 재난을 맞았다.

국민연금의 동의를 얻지 못하면 기업 구조조정도, 회사채 발행도, 주식 발행도, 자본 조달도, 심지어 경영자 선임도 더는 불가능하다. 국민연금의 ‘필연적 경영 개입’은 말 그대로 피할 수 없다. 지금 600조원에 도달한 연금 자산은 차기 대통령 임기 말이면 1000조원에 달할 것이다. 국민연금이 5% 이상 대량 지분을 보유한 상장사는 지난달 2일 기준 285개다. 10% 이상인 상장사도 76개다.

국민연금은 이미 자산운용에서도 큰 제약에 직면하고 있다. 보유 주식 상당수는 지금의 지분율도 높아 더는 사들이기 어렵다. 연금의 포트폴리오가 시장 그 자체와 같아지면 더는 운신의 폭도 없어진다. 국민연금은 적립액의 15.3%를 해외 주식에 투자하고 있다. 국민의 강제 저축으로 형성된 자본을 해외에 유출시키는 꼴이다. 기업들의 공장 이전보다 질이 더 나쁘다. 더구나 연금은 2040년이면 순현금유출이 예상된다. 탄력적인 자산 운용은 불가능해진다.

더구나 국민연금을 장악하려는 정치권의 압력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연금사회주의를 꿈꾸는 좌파 정권은 더욱 그럴 것이다. 그동안에도 좌파 성향 정치 교수들은 의결권을 장악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왔고, 기업 지배구조 개혁이라는 명분 아래 연금 자산을 통한 기업 지배에 군침을 흘려왔다. 의결권위원회도 이런 의심에서 자유롭지 않다.

국민연금을 장악하면 대한민국 모든 기업을 장악할 수 있다. 국민연금은 이미 SK(주)와 SK C&C 합병과 정몽구 회장의 이사 선임에 반대표를 던졌다. 대체 무슨 근거로, 그리고 제멋대로 반대표를 던졌는지에 대해서는 설명조차 없다. 외부 의결권 자문사들에 위탁한다는 방안도 나왔다. 그러나 이들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반대에서 봐왔듯이 국민경제적 이익과 상관없이 투기적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시민단체들도 해외 투기세력과 음모적 협력을 해온 전력을 숨길 수 없다. 연금을 작은 규모로 분할해 경쟁시키거나, 자산 운영을 민영화하는 방법을 생각해볼 때다. 2000조원의 단일 권력에 유혹받지 않을 권력은 없다. 민영화를 통해 국민 각자가 선택하도록 할 밖에 ….

정규재 논설고문 jkj@hankyung.com